1984(1949) & 유형지에서(1919)
by 크리스
💡분류 : 독후감

어디에도 없는, 그러나 어디에도 있는

‘난 보랏빛이 좋아.’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에 등장하는 유명한 대사다. 교과서에서 설명하는 보라색의 의미는 주인공의 죽음과 비극을 암시하는 복선이었고, 그렇게 주입식 교육을 받은 우리는 어떠한 의심과 거부감 없이 이를 수용했다. 학창시절 소나기를 배우고 난 이후 문학작품에서 등장하는 보라색은 기계적으로 어두움과 죽음, 또 비극의 심상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2년 전쯤이었을까, 흥미로운 기사를 하나 본 적이 있다. 대중에게 죽음의 상징성을 주입했던 ‘보라색’이 그저 저자인 황순원이 좋아하는 색이었기 때문에 쓰였을 뿐이라는 주장이었다. 이후 찾아본 바에 의하면, 실제로 저자가 직접 이에 대해 언급한 인터뷰는 없었다. 단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풍문에 불과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관습적으로 굳어진 ‘보라색’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은, 문학 작품에 대한 소위 ‘전문가’들의 해석과 ‘집단적 이해’에 대해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태도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조지오웰과 프란츠 카프카가 가지는 무게감 역시 내 스스로의 능동적 이해보다는 대개 학창시절 교과서에 쓰인 내용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진보적 지식인이면서 사회주의, 전체주의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작품세계에 드러낸 조지오웰과 환상적이면서 비현실적 공간에서 드러나는 인간 본질에 대한 실존주의적 메시지를 던져준 카프카. 특히나 카프카의 경우에는, 죽음 이후 알베르 카뮈와 사르트르의 발굴 이후에서야 빛을 보았으니 그 문학의 정체성 자체가 권위로부터의 ‘해석’에서 시작되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술의 한 형태로서 문학 작품이 그 의의를 지닌다면, 작품에 대한 이해는 ‘2+2=5’라는 사회적 인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현대에 강조되는 예술의 흐름은 작가의 의도에 매몰된 시각을 수동적 수용하기보다는 보는 이의 능동적 상호작용을 중시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특히 세대를 초월하는 고전일수록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하는 매력이 있다.​

조지오웰과 카프카의 글에 대한 나의 자의적 해석이 기존의 접근과 조금은 다를 수도 있다는 우려가 들지만, 1984의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가 갈구하는 자유, 즉 ‘2+2=5’가 진리로 받아들여지는 오세아니아에서 2 더하기 2는 4라고 말할 수 있는 것. ‘그것이 허용된다면 다른 모든 것은 자연히 따라오게 되어 있다’는 믿음을 근거로 책을 읽으면서 생각한 바를 몇 개의 짧은 호흡으로 적어 보았다.

신분제는 완전히 사라졌는가

근대와 전근대를 나누는 기준은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근대의 시작이 이성의 세속화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르네상스 시기 이전까지 인간 사회의 모든 이성은 신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는 이성은 신만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었고, 이는 곧 권력을 의미한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교회가 독점하던 이성에 대한 범대륙적인 반란이 일어났고, 교회로 대표되는 기득 권력은 절대왕정으로 이전되었다. 이후 알다시피 18세기 후반에 일어난 시민혁명을 통해 왕정체제는 무너졌고, 부르주아를 대표로 하는 시민사회로 이양되었다. 비로소 현대적 의미의 근대국가 모델이 등장한 것이다. 권력의 역사적 이행 과정을 평가하는 우리의 굳은 믿음 중 하나는 대중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폭발적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획득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1984>에서 당에 저항하는 상징으로 등장하는 골드스타인은 유사 이래 어느 세계나 계급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주장한다. 시대를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고 인간은 상, 중, 하의 세 가지 계급에 구속된다는 것이다. 단지 그 형식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세분되었고, 다른 이름으로 붙여졌을 뿐이다. ‘사회의 근본적인 구조는 결코 바뀐 적이 없다’는 그의 통찰은 과거에 비해 자유롭고 평등한 민주주의적 시민사회를 구축하였다는 믿음에 의문을 제기한다. 과연 우리는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에서 살고 있는 것인가. 역사책에서나 볼 수 있던 과거의 불합리한 신분제에서 완벽하게 해방되었을까. 교과서에 적혀있는 대답은 ‘그렇다’이겠지만, 현실에서 보이는 모습은 대답을 망설이게 만든다.

자본주의는 완전하게 승리하였는가.

‘자본주의’가 등장한 이래 이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자본주의의 핵심인 경쟁과 자본의 집약이 가져온 물질적 풍요에 대한 예찬과 더불어 인간성의 상실과 거대한 양극화를 정당화하는 내재적 모순에 대한 회의감은 늘 공존해왔다. 19세기 자본주의에 대한 반발로 범지구적으로 공산주의 사상인 맑시즘이 등장했고 곳곳에서 인간사회를 대상으로 한 사회주의 실험들이 일어났다. 다른 한편에서는 이러한 운동에 대한 반작용으로 자유주의와 시장에 대한 믿음은 더욱 공고해졌고 시장자본주의 체제는 더욱 정교하게 설계되었다. 이후 역사적으로 공산주의 실험들이 실패하면서 자본주의 체제의 완전한 승리가 확실시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나, 자유와 평등의 공존이라는 주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있다.

조지 오웰이 그리는 <1984>의 배경은 전체주의, 즉 공산주의가 세상을 잠식했을 때의 모습이다. 여기서 그려지는 ‘오세아니아’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거부할 수 없는 불편함을 불러일으키는 디스토피아 사회다. ‘빅브러더’로 대표되는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와 이를 정당화하는 폭력적 수단들, 그리고 이에 대해 어떠한 거부도 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이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사회주의 국가에서 태어나지 않은 현재에 감사한 마음이 들 지경이다. 이 글이 세상에 나온 것이 49년인 것을 생각해보면, 그의 날카로운 통찰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그리는 ‘오세아니아’의 모습은 20세기 후반 사회주의 국가 체계가 드러낸 구조적 한계와 내재적 모순을 놀라울 만큼 잘 짚었다.

그러나 <1945>에서 그리는 사회주의 세계가 놀라울 만큼 비참하고 비극적이라고 해서, 또는 세계를 대상으로 한 공산주의 실험이 실패하였다고 해서 평등을 추구하는 이상사회에 대한 인간이성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거나 현재의 불평등의 불가피성을 그대로 수용하고, 현 체제에 대한 맹목적 합리화는 경계해야 한다. 앞서 말했듯, 어느 사회에서나 이름은 달라지었을지언정 계급과 신분은 존재한다. 또한 그것들을 내재화하고 복종하게 하는 사회적 메커니즘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그 핵심은 아이러니하게도 사회주의국가의 비참함을 그리는 <1984>에서 등장하는 ‘시선’이다. 곳곳에 존재하는 빅브러더의 눈은 체재에 대한 복종을 강요하고 스스로가 스스로를 구속하게끔 만드는 기제다. 체제를 내재화하는 시선은 여전히 우리사회에 존재한다.

복종을 강요하는 타자의 ‘시선’

사실 ‘시선’은 현대 철학의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의 철학은 나와 완전히 독립된 존재인 ‘타자’에 대한 인식과 중심부와 주변부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다. 특히 시선은 타자를 개념화하는 핵심이다.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대타존재의 첫 번째 문제에 대해 ‘타자란 나를 바라보는 자’라고 정의한다. ‘응시’에 대한 해석은 철학자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시선은 곧 힘이며, 그 끝에 와 닿는 모든 것을 객체로 사로잡아버린다’는 핵심은 유사하다. 사르트르는 존재 근거를 부여해주는 ‘신’의 부재를 가정하면서, 누구로부터도 존재 근거를 부여받지 못한 상태에서 타자의 시선에 포착된 나의 모습은 그대로 나의 존재근거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나를 객체화 하고 나의 존재 근거를 던져주는 타자의 시선에 대한 반응은 오웰에 의해 어느 곳에서나 나를 따라 움직이는 빅브러더의 눈과 이에 대응하는 대중의 모습에서 드러난다. 빅브러더와 같은 구조적 감시 기구가 아니더라도, 현실에서 타인의 시선에서 완벽하게 자유롭기란 쉽지 않다.

이와 비슷하게 미셸 푸코는 그의 저서 <감시와 처벌>에서 국가폭력 차원의 처벌행위에서 ‘보는 것’과 ‘보임 당하는 것’의 분리가 전근대와 근대를 구분 짓는 줄기이며,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분리가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보이는 것’과는 별개로 ‘보임 당하는’ 개인은 그 자신을 스스로 구속하며, 복종의 내면화를 강요받게 된다. 푸코는 제레미 벤담이 제시한 감옥인 ‘판옵티콘’의 예를 들며, 이러한 응시의 주체가 감춰진 감시의 모델이 그 이름과 형태를 바꿔 현대 사회에 널리 펼쳐져 있음을 지적한다. 감옥을 분석한 것이지만 사실상 이를 바탕으로 근대사회가 거대한 감시사회임을 말하고 있다.

특히 푸코가 말하는 ‘순종하는 신체’의 메커니즘은 <1984>에 등장하는 복종의 방법과 굉장히 유사하다. 그가 말하는 ‘순종하는 신체’는 사회가 인간의 신체를 분석하여 조작하고, 종국에는 체제에 복종하게 만드는 메커니즘을 일컫는다. ‘복종’의 목표는 변화시켜 쓰임새가 있도록, 나아가 ‘완전’하도록 하는 것이다. 완전에 대한 기준에 의문을 품거나, 구조가 만들어내는 질서에서 탈락하는 개인은 처벌의 기제를 통해 다시금 교정을 강요받는다. 이러한 감시와 처벌 체제 속에서 인간은 일개 부품으로 전락하게 되고, 잘 정돈된 부품으로 재조립돼 사회로 편입된다. 푸코는 사회가 만드는 감시와 제재의 결과로 ‘완전한 개인’이 만들어지며, 개인은 권력에 의해 규격화되어 권력운용의 객체이자 수단으로 전락해버렸다. <1984>에서 당의 통제에 순종하는 당원들의 모습은 ‘순종하는 신체’의 전형을 보여준다.​

프란츠 카프카의 <유형지에서>에 등장하는 장교의 모습도 타자의 시선에 대한 강박에 가까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기계’에 대한 외부인이자 감시자의 역할을 맡게 된 탐험가의 평가와 시선에 목을 맨다. 반대로 탐험가는 어떠한 반대되는 의견도 수용하지 않겠다는 확신에 찬 장교의 시선을 피하려고 ‘목표도 없이 주위를 돌아본다.’ 그러나 곧 장교는 탐험가의 두 손을 잡고 그의 시선을 붙잡으려고 애를 쓴다. 결국 파국에 치닫게 되는 장교의 행동 또한 탐험가의 회의적 반응에서 비롯된다. 탐험가의 의문은 장교로 하여금 스스로를 기계에 올려 죄를 자청하게 만든다. 신앙에 가까워 보이는 무조건적 내적 이념 또한 실제로는 스스로가 설정한 타자의 시선과 인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대목이다.​

현재 우리를 규정짓고 있는 시선은 <1984>에서처럼 유형적이고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그 존재를 부정하기는 힘들다. 인간 내부적인 차원의 시선과의 인식론적 상호관계와는 별개로, 푸코가 말했듯, 근대 이후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는 권력과 복종을 내재화하는 시선의 메커니즘의 은폐가 우리가 경계해야할 부분이다. 대개 체제의 복종을 강요하는 시선, 즉 권력은 이데올로기의 형태로 사회 곳곳에 숨어 있다. ‘이데올로기(Ideologie)’는 사념(idea)들의 논리(logic)를 의미한다. 즉, 떠도는 아이디어들을 하나의 논리적 맥락으로 정당화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논리체계다. 이데올로기를 설명하는 여러 특징 중 하나는 스스로의 정당화 논리를 끊임없이 재생산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에서 가장 경계해야할 시선은 현재의 모순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와 불평등의 불가피성에 대한 합리화를 강조하는 이데올로기다. 앞서 말했듯이, 조지 오웰은(혹은 골드스타인은) 유사 이래 계급은 언제나 세 가지로 존재해왔다. 그 근본적인 구조는 결코 바뀐 적이 없으며 엄청난 격변과 돌이킬 수 없어 보이는 변화가 일어난 후에도 언제나 똑같은 패턴이 다시 등장했다. 오웰이 공산주의를 부정적으로 그렸다고 해서, 자본주의를 옹호한 것은 아니다. 그의 에세이 모음인 <나는 왜 쓰는가>를 보면,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의 비인간성과 시장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경쟁과 여기서 탈락된 이들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곳곳에 묻어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스파크에서’라는 글은 그 자신이 영국의 구빈소를 직접 경험하면서 느꼈던 바를 생생하게 묘사하는데, 국가의 국민에 대한 시혜적 차원의 접근이 얼마나 인간의 존엄을 파괴하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오웰은 사회주의에 대한 비관적 미래를 제시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본주의가 가져온 폐해에 대해서도 공감하고 있다.

현실에 투사된 오세아니아의 잔상

어느 시대에서도 정치와 경제는 분리될 수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하나의 경제논리가 철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의 코어를 잠식하고, 대중의 사고를 지배한 적은 없었다. 자본주의와 경쟁의 논리, 그리고 ‘합리적 개인’이라는 모델의 발명이 폭발적인 물질적 풍요를 가져온 것은 사실이다. 경제논리, 최근엔 신자유주의로 이름 붙여진 시장의 논리가 논리적이고 실증적으로 발전해 온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완전한 진리로 여기는 태도는 경계해야 한다. 그것이 <1984>가 말하는 핵심이라 감히 말하고 싶다. 내가 이해한 오웰이라면, 지금의 범세계적 ‘신자유주의’에 대해 분명 거부감을 느꼈으리라. 탈락한 개인, 탈락한 공동체에 대한 안전장치가 없는 현재의 이론이 정합적으로 무수한 통계와 논리로 무장되어 그 자체로 정당화되는 모습은 그가 그린 <1984> 속에서 빅브러더로 대표되는 당의 위엄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오세아니아’의 모습과 꼭 닮아 있다.​

카프카의 ‘유형지에서’에 등장하는 끔찍하리만치 잔인한 기계는 실로 의미심장하다. 카프카의 문학 대개가 그렇듯 비현실적 공간을 상정하고 여러 상징이 복잡하게 등장하여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는 여지가 많지만, 인간을 구속하는 정체모를 거대한 기계와 그에 대한 집착이 인간성을 상실하게 만들고 결국 파괴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경고로 읽어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러한 해석은 ‘유형지에서’가 20세기 초에 쓰여 졌다는 점에 그 근거를 둘 수 있다. 거대한 전쟁과 물질적 풍요에도 불구하고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경제적 위기는 대개 그 시대를 살았던 지식인들이 그랬듯 카프카에게도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을 일으켰으리라. 카프카는 이를 하나의 논리에 완벽히 잠식되어 끝끝내 스스로를 기계의 재물로 삼은 장교의 모습으로 드러낸다. 이는 체제에 대한 완벽한 복종과 무비판적 수용의 최후를 암시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1984>에 등장하는 오브라이언과 <유형지에서>에 등장하는 장교는 기존 체제에 대한 복종에 어떠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체제에 대한 복종의 완벽한 내면화다. 반대로 그 양상은 다르지만, 이들과 반대의 입장에 서 있다는 점에서 윈스턴 스미스와 탐험가는 오몰로지(homologie)적이다. 결국 둘 다 작가들의 회의적 시각이 반영된 결말(완벽한 파멸이라는 결말과, 장교의 죽음을 막지 못하고 이탈해버리는 모습)을 맞이하게 되지만, 줄곧 그들은 부조리와 부정의에 대해 소극적, 때로는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모습을 보인다. 과연 이들의 모습은 체제에 대한 저항의 결과가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굴복한다는 인간이성의 패배를 상징하는 것일까. 아니면 무엇도 바뀔 수 없다는 회의주의를 상징하는 것일까.​

나는 단호하게 그 무엇도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하나의 희망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그들이 말하는 바는 디스토피아에 대한 회의와 인간이성의 패배가 아닌, 그러한 사회로 가는 현 구조와 굴종의 메커니즘에 대한 ‘합리적 경계’다. 과학철학에는 ‘귀납주의적 비관주의’라는 개념이 있다. 역사를 돌이켜 보았을 때, 그 당시에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며 절대시되었던 모든 개념과 이론, 가치와 철학이 종국에는 깨져버린다는 것이다. 과거 지구가 평평하다는 논리는 온갖 ‘과학적’ 이론으로 무장되었지만, 현재는 그 누구도 동의하지 않는다. 화학을 비롯해 물리학, 생물학 등 어떠한 이론도 영원불멸한 생명력을 지니지 못한다. 이러한 개념을 그대로 사회에 옮겨 온 것이 맑시즘에서 말하는 자본주의의 종말이다.

자본주의의 종말에 대한 현실성 혹은 믿음과는 별개로 불과 3세기 전에야 태어난 자본주의가 영원불멸할 것이라는 신앙적 수준의 믿음에 대한 의심은 합리적이다. 또 그러한 믿음은 오웰과 카프카가 말하는 전체주의에 매몰된 개인의 모습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자본주의의 불가피성이라는 구조에 매몰되면 정체된 사회의 구조를 벗어날 수 없고, 더 큰 자유와 평등을 누리기란 언제나 불가능하다. 나를 주시하는 모든 시선과 나를 복종하게 만드는 논리에 대해 계속해서 의심하고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어야만 더 큰 자유와 더 큰 평등을 가져올 수 있다.

현재 소위 주류로 불리는 경제학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자본주의를 정당화한다. 어떤 학문에서도 과학적 관찰과 실험이 전제되지 않으면 권위를 인정받기 힘들다. 과학으로 무장된 주류 경제학의 이론들은 그대로 대중들에게 흡수되고 있다. 그러나 관찰된 ‘사실’들로 ‘진실’을 유추하는 귀납적 방식은 본질적으로 한계를 드러낸다. 흔히 쓰는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다.’라는 말에는 ‘해는 동쪽에서 뜨는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매일 관찰되는 ‘사실’이 ‘진실’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나 1926년, 인류 최초로 북극점에 도달한 로알 아문센에게 태양의 여명은, 남쪽에서 시작됐다. 경험적으로 반복되어 객관성이 확보된 사실이라 하더라도, 진실의 모든 영역을 보장할 수는 없다.

<1984>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2+2=5’라는 문구를 보며, <유형지에서>에서 기계의 우수성을 진심으로 예찬하는 장교의 모습을 보며 전지구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거대한 불평등과 양극화를 정당화하고 기계적으로 합리화하는 모습과 논리들이 떠올랐다고 하면 너무나 치우쳐진 비약일까. 그러나 어디에서도 없을 것 같은 그들의 모습은 사실 어디서나 보이는 우리의 모습과 다름이 없다. 결국 그것은 우리의 이야기이다. 아마 그들이 말하는 메시지는 파괴를 불러일으키는 무조건적인 종속에서 해방되는 개인에 대한 희망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인류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2015년 5월

크리스
@yoorak_coffee_roas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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