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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전2

<2016년 1월>
싸했다. 수시 합격으로 신나서 잠들려던 때, 합격 발표만 나고 끝인가? 그냥 알아서 학교에서 연락이 오는가 싶었다. 대학교 홈페이지에 로그인했더니 글쎄 3월 개강 전까지 할 일이 얼마나 많던지. 가만히 있으면 합격 의사를 밝힌 게 아니었다. 입학하지 않으면 끝인 게 아니었다. 입학금을 내야 입학 의사를 밝히는 거였다. 이미 입학금 내는 기한은 며칠이나 지났다. 왜 아무도 입학금 내라는 말을 안 해줬지. 몸이 너무 뜨거워졌다. 학교 등록금도 며칠 늦어도 날 퇴학시키진 않았으니까 뭐 내일 연락해 보면 되겠지. 자사고 출신에 면접 점수도 당연 1등일 내가 어떻게 떨어지냐며.

일단 부모님께 알렸더니 나보다 더 난리였다. 왜 당신들이 미리 못 챙겼을까에 대한 미안함과 함께, 일단 내일 학교에 찾아가 보자는 말. 다음 날도 아니지. 새벽 동틀 때 즈음 입학처에 가는 길에 나는 아빠가 우는 모습을 난생처음 봤다.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 어지간하면 얼굴 근육을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내가 아빠를 울렸다. 본인에게 해코지한 사람이 아닌 어떤 사람에게 정말 미안하다, 제발 부탁이라며 울고 손바닥을 싹싹 비볐던 아빠.

부모님의 맞벌이 탓에, 어린이집 소풍 간식과 학교 준비물은 늘 내 손으로 챙겼던 나다. 일찍 철들었다. 어른 글씨체도 물론. 가정통신문 부모님 사인을 도맡아 했고, 조금 덜 어른스러운 글씨체로 친구들의 부모님 사인도 대신 잘해주기로 유명했다. 동창회 때 빨리 철든 나를 은근히 칭찬했던 부모님을 보며 난 당신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수행평가, 성적표, 생활기록부, 용돈, 기숙사 생활, 유료 인강. 그 모든 걸 난 내가 알아서 결정했다. 대학까지. 좋게 말하면 내 결정을 당신들이 믿어준 거고, 안 좋게 말하면 방치한 것. 친척들 사이에서도 나는 어쩜 저리 알아서 척척 잘 크기로 유명했으니. 난 내가 알아서 잘했어야 했고 나쁘지 않게 큰 것에 자부심도 있었다. 중학교 때 2번 빼고 항상 전교 1등. 자사고에 전액 장학금 지원받고 입학까지 했으니 난 대학까지 잘 가야 했다.

근데 그 아침, 모든 게 무너졌다. 나는 감히 그런 실수를 할 사람이 아닌데. 이런 실수를 난생처음 한 지라, 얼마나 큰 실수를 한 건지 감도 안 왔다. “어? 안 된다고요?” 스스로만을 탓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믿기까지 족히 몇 주 걸렸다. 머지않아 졸업식 날, 오직 담임과 나만 아는 이 비밀이 눈빛에 터져버렸다. 졸업장 주는 시간. 친구들 이름을 부르며 졸업장 주실 때는 웃으시더구먼 내 이름이 불리니 갑자기 울어버리니 친구들은 당황했겠지 뭐. 3년을 믿었던 내가 어이없는 실수를 했으니. 쪽팔려서 이 이야기는 아직까지도 담임, 나, 부모님만 안다. 사연이 있어 재수한 줄 안다. 그 사연이 고작 이건 줄은 아무도 모른다. 그저 한번 더 도전한 줄 알지. 기억은 미화된다는데, 이 이벤트는 그 후로 단 한 번도 세상에 나온 적 없다. 미화되어 나온 적도 없다. 종종 꺼내는 추억도 못 되는 진짜 강력한 기억.

“그 해에 입학했으면 불행한 일이 분명히 있었을 거다. 행운이 있으려고 그랬나 보다.” 담임이 마지막으로 한 말. 운도 더럽게 없지. 평생 날짜와 시간에 민감한 내가 됐지만. 말대로 그 해 입학식하러 가는 날, 교통사고가 났을 수도 있다. 평생 있을 불행을 1년에 묻었다 생각하며 살고 있다. 로또가 안 되고, 남자친구와 아프게 헤어지고, 할아버지가 쓰러져 해외여행 하루 전 모든 걸 취소했어도 그리 불행하다 생각 안 한다. 그때보다 불행한 적은 아직 없다.

(8.7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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