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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고
무엇이든 동그란 것을 좋아한다.
네모보단 세모. 세보보단 동그라미가 좋다.
둥그런 원이 좋다. 원. 그래서 내 이름을 사랑하나보다. 주위 친구들은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이름을 지어주셨다고 했다. 손녀, 손자에게 줄 이름을 짓는다는 게 얼마나 벅찬 일일까. 뭐 요즘은 작명소에서 돈 주고 이름을 짓기도 한다만. 보통의 대한민국 사회는 한자의 획과 뜻을 잘 빚어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름을 짓는다. 내 이름은 우리 아빠가 지어주셨다. 하나밖에 없는 딸 이름을 꼭 자기가 짓고 싶다하셨다. 직접 책을 사 모아 사주와 작명을 공부하셨다.
그렇게 해서 나온 내 이름. 아빠 성과, 동그라미가 두 개 들어가는 내 이름. 나중에 들은 거지만, 사주 선생님이 내 이름 누가 지었냐며 참 좋은 이름이라고 하셨다. 의미 있고 소중한 내 이름. 누군가 나를 부를 때 입술이 동그랗게 모아지는 게 좋다. 소리만 들어도 기분 좋다. 비눗방울 같은 내 이름이다.
행운.
행운도 그렇다. 두 음절뿐인 짧은 단어지만, 동그라미는 세 개나 들어있다. 행운. ㅎㅇ. 지금 보니 내 이름과 초성이 같다. 이 세상에 나오고 보니 이름에 히읗과 이응을 갖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히읗이 들어간 단어를 보면 괜히 기분이 좋다. 행운, 행운은 나에게 이름과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연필로 종이에 ‘행운’을 쓸 때도 괜스레 광대가 봉긋 솟아오르고, 길을 걸어가다 ‘행운’을 보게 되면 웃음이 난다. 매일 한 번 이상은 듣는 내 이름. 동그란 이름이 불릴 때마다 행운이 찾아온다고 믿고 싶어졌다.
보통 어떤 걸 겪어야 운이 좋다고 하는 걸까. 대부분 로또 당첨을 행운이라고 표현한다. 내가 평생 벌어도 가질 수 없는 돈을 종이에 적힌 번호 6개로 얻는 거니까. 결국 내가 원하는 게 갑자기 이루어지면 운이 좋다고 한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댓글 이벤트에 당첨돼서 콘서트 표를 받거나, 떨어진 줄 알았던 대학교에서 뒤늦게 합격전화를 받게 됐거나. 결국 내가 쉽게 갖지 못하는 것을 원하고 바란다. 그게 별다른 노력 없이 덜컥 되는 게 행운일까?
큰 행복이 오길 바라며 사람들은 행운을 거창하게 생각한다. 오늘 하루 속에서 행운을 찾으라고 하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데 말이다. 행운이란 게 그렇다. 단어만 봐도 긍정적이고, 좋고, 밝다. 아무리 예쁘고 밝은 조명이라도 계속 눈앞에 두면 시야가 어두워진다. 마냥 밝고 예쁜 행운을 계속 눈앞에 두고 바라면 되려 불행한 삶이 된다. 좋은 일이 생겨도, 더 큰 행운을 바라고. 보다 큰 욕심이 일상의 작은 행운을 놓치게 된다. 그냥 열심히 살면… 아니 그냥 살자. 살다 보면 녹색의 반짝이는 행운이라는 친구가 날아와 머리 위에 앉는다. 내 머리 위 나비처럼 앉았다가 떠나간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이 세상에 대가 없이 주어지는 것은 없다. 등가교환의 법칙. 법칙은 법칙이다. 현실 곳곳에 숨어져 있는 법. 쉬는 날 카페에서 여유를 즐기고 싶을 때가 있다. 오늘 내가 하고 싶은 건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책 읽는 여유다. 카페에서 여유로움을 느끼고 싶다면 커피값을 내야 한다. 그래야 풍경 좋은 자리에 앉을 수 있다. 내가 나를 위해 쓰는 시간에도 체력이 들어가고, 돈이 들어간다.
행운도 똑같다. 행운은 내가 살아온 시간 속 한 부분의 기억을 골라 빼간다. 그게 행복한 기억이든, 힘들었던 기억이든. 나에게 줄 행운과 내 경험을 등가교환한다. 이 세상에 대가 없이 주어지는 게 없다면, 대가 없이 주어지는 행운도 없다. 내 기억을 가져가 행운을 준다면, 행운이 가져간 내 기억이 예쁜 게 좋으니까. 그냥 열심히 살자.
그러고 보니 내 생에 행운이란 게 있었나?
누구나 한 번쯤은 연예인을 가슴 속에 품고 산다. 난 어릴 때부터 유난히도 티비와 컴퓨터를 좋아했다. 그래서 그런 걸까. 지금 동년배 친구들보다 더 많은 연예계 세상을 알고 있다. 소위 말하는 케이팝 교수님 역할을 하고 있다. 학창 시절부터 케이팝 사랑은 대단했고, 또 대단했다. 처음으로 좋아한 연예인이 아마도 가수 비 (정지훈) 였던 것 같은데. 드라마 풀하우스를 꼬박꼬박 챙겨봤던 여름이 생각난다. 다음으로 좋아한 연예인은 배우 공유(공지철). 예상할 수 있다시피 이번에는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 덕분이다.
대한민국에 컴퓨터 음악이 등장하고, 아이돌 산업이 나타나면서 자연스레 케이팝 아이돌을 좋아하게 됐다. 학창 시절 내내 아이돌을 좋아하다 성인이 된 후부터는 밴드 음악에 빠졌다. 언제쯤 끝날지 모르는 무한한 덕질 생활에 여전히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당신은 ‘덕계못’ 이라는 말을 아는가. 덕후는 계를 못 탄다는 문장을 줄여 덕계못이라고 한다. 나는 길거리를 지나가며 한 번도 내 최애, 내 연예인을 실제로 본 적 없다. 별로 연예인에 관심도 없는 내 친구가 길을 걷다 내 최애를 봤다거나 하는 그런 이야기. 그게 ‘덕계못’이다. 덕후는 계를 못 타요. 팬이란 그런 것이다. 아무리 방구석에서 좋아한들 미친 듯이 좋아하는 나는 못 보고, 관심 없는 내 친구가 계를 타는 것.
4년 전 겨울이었다.
살다 보니 나에게도 이런 일이 생기는구나.
난 뒤늦게 전공을 바꾸게 됐고, 국내 밴드에 눈을 뜬 시기였다. 덕질할 대상이 생기면 오직 그 대상에게 내 시간과 체력을 쏟는다. 유튜브에 밴드를 검색하고, 각종 SNS에서 사진이나 영상을 보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끝낸다. 그날은 내가 좋아하는 밴드가 저녁 여덟 시에 깜짝 팟캐스트 공지를 올렸다. 팟캐스트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은 딱히 없었지만, 접속 인원에는 제한을 뒀다. 팬이 몇 명인데 겨우 오백 명만 접속할 수 있는 시스템이라니. 오세요, 오세요. 값싼 물품 많이 팝니다 홍보는 많이 했는데, 막상 가보면 구멍가게인 느낌이랄까. 이런 이벤트성 팬미팅을 할 거면 미리 얘기하고, 인원을 좀 늘려주면 좋으련만. 그래도 뭐 어때. 일단 들어가면 되는 거 아냐?
항상 바빠 죽겠을 때 하고 싶은 게 넘쳐난다. 해야 할 일이 많았지만, 팬심 하나로 속전속결. 저녁 여덟 시가 되기 전에 다 마무리했다. 이제 내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은 우리 오빠들을 보기 위해 모든 준비를 끝내는 것. 그날 진행했던 팟캐스트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온라인에서 하는 작은 팬미팅과 같은 것이라 연예인과 직접 얘기할 수 있었다. 접속한 팬들 가운데 특정 한 명을 선택해 연예인과 말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는 것.
즉, 내가 우리 오빠랑 일대일로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엄청나고 대단한 공간이라는 건데… 잊지 말자 덕계못의 법칙. 법칙은 법칙이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어딜 가나 존재하는 법. 마음을 비우자. 운이 좋으면 대화할 수 있겠지만 그런 일은 쉽게 오지 않으니까.
쉽게 오지 않으니까. 그래, 쉽게 오지 않아. 그렇긴 한데 말이지. 기대하는 건 괜찮잖아? 내 안에 항상 잔잔하게 깔린 관종이라는 친구는 그때 갑자기 문을 두드리고 나타났다. 오백 명이면 승산 있다. 오천 명, 오만 명도 아니고 오백 명 중 하나잖아? 아무리 내 이름을 사랑한다고 한들, 세 글자의 둥그런 한글은 전혀 오빠들의 눈에 띄지 못할 것 같았다. 곧바로 닉네임을 바꿨다.
[ 루시 제 5의 멤버 ]
왜 5의 멤버냐고? 그 밴드 인원이 4명이다. 원래 사람은 활자보다 사진에 눈이 갈 수밖에 없다. 닉네임만으로는 오빠의 눈에 그저 스쳐지나갈 것 같았다. 활자보다는 사진이 확실하겠지. 그럼 프로필 사진을 바꿔야겠구나. 나의 악기 베군(베이스 기타)을 들고 연습할 때 찍은 사진으로 바꿨다. 그들은 밴드이기에 자연스럽게 악기를 보면 궁금증이 생길 거라는 판단하에 내린 행동이었다.
베이스 기타를 들고 있는 루시 제 5의 멤버. 솔직히 내가 봐도 이건 승산이 있었다. 뭔가 기운이 좋았다. 아니, 확실히 뭐 하나는 될 것 같았다. 행운은 원래 쉽게 오지 않으니 내가 확률을 더 높이는 수밖에. 한술 더 떠서 혹시나 내 베이스 연주를 들려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베이스 기타와 앰프까지 미리 준비했다. 두 큰술 더 떠서 루시 노래 중 내가 제일 아끼는 베이스 라인을 연습했다. 모든 준비는 다 됐다.
저녁 여덟 시가 되자마자 빠르게 입장을 클릭했고, 선착순 오백 명에 들었다. 이거였다. 케이팝 덕후 짬이 여기서 나오는구나. 그 공간에 들어간 것만으로 행운의 신은 나의 뜻을 조금 들어준 거 아닐까? 사실 들어간 이후부터는 운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이름도 사진도 특별하게 바꾼 나를 알아봐 주는 건 이제 그들의 몫이니까. 그때였다.
“오, 제가 임의로 고르는 거지만. 이분 좀 특이한데요? 일단 아이디가 심상치 않습니다.”
“베이스를 치고 있네요?”
? 뭐지 이거. 나 꿈인가. 진짜다. 이거 실전이다. 행운의 신이여.
보컬 멤버가 눈에 띈다며 나를 골랐고, 직접 대화할 수 있는 마이크를 켜줬다. 정말 떨리면 염소 목소리가 나온다고 하더라. 염소는 무슨, 내 성대에 진동기가 달려있는 줄 알았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하니 어떤 걸 담당하냐는 물음에 베이스 기타로 응답했다.
‘우웅-.’
소리를 들려주니 아니나 다를까, 월척이다. 베이스 소리가 난다며 마구 웃고, 들뜬 목소리가 내 귀를 꽉 채웠다. 2초의 베이스 소리로 우리 오빠들을 이렇게 웃길 수 있다고? 난 진짜 다 가진 여자야. 웃음이 조금 걷어진 후, 바로 준비한 베이스 라인을 쳤다.
“제자로 모시고 싶은데 레슨 받으러 오지 않을래요?”(대충 이런 뉘앙스였다. 저 떨렸다고요. 기억 안 난다고요…)
그 이후부터는 멤버들과 간단히 대화했다. 대략 5분이 지나 마이크가 꺼지고 난 후, 나는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드러누워 천장을 보며 BPM 250으로 뛰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내 생에 이런 날도 오는구나. 덕계못 깰 수 있는 거구나. 처음으로 인생에 큰 운을 맛보았고, 짧은 5분이 극강의 단맛으로 느껴졌다. 난 김칫국 마시며 악기와 앰프를 준비했고, 들려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 그 곡의 라인을 연습했다.
운은 그냥 오지 않는다. 분명 그날의 행운은 내 인생의 한 부분을 가져갔을 것이다. 인생 첫 눈을 보며 행복하게 지었던 미소를 가져갔거나, 첫 수시에 떨어져서 하루 종일 흘렸던 눈물을 가져갔거나. 운처럼 보이지만 예감과 준비가 만든 기회였다. 그날 나는 운을 감지했고, 준비했으며 붙잡았다.
운은 세상을 날아다니다 가끔 내 머리 위에 쉬어간다. 어느날은 너무 가벼워서 모르고, 또 어느날은 너무 무거워서 알게 된다. 운은 먼저 두드리지 않는다. 운의 무게를 아는 건 나 자신이다. 다만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노력했는지 운은 안다.
행운은 살다 보니 온다. 그러니까, 그냥 살자. 행운이 기분 좋게 가져갈 인생의 재미나고 동그란 기억을 많이 만들면서.
난 오늘을 산다.
오늘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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