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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편지를 남겨. 이건 다시없을 노래, 사라질 기억에 관한 거야.
꽤 오래전에 너를 발견했어. 너는 그날을 잘못된 처음이라고 이야기했지만 말이야. 먹물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을 가진 너.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서있던 너. 너에게는 발소리가 나지 않았어. 나는 네 발이 꼭 시린 물속에서 나온 것 같다고 생각했지. 문득 내가 알지 못하는 너의 수많은 발자국을 떠올렸고 그때부터 나는 질문이 많은 사람이 되었어.
종종 너를 기다렸어. 커피를 내리는 동안 시간이 흘렀고 그때의 침묵은 새벽을 덮을 만큼 고요했어. 까닭 모를 마음으로 가장 큰 잔을 골라 네 몫을 따르곤 했어. 그거 아니. 너를 안으면 네가 싣고 온 바람 냄새가 났고 거기에는 늘 계산 없는 마음이 안개처럼 떠다녔다는 거. 너와 나는 각자가 이해한 세상을 꽤나 좋아했던 것 같아. 너는 내가 그린 장면을 감상했고 나는 네가 기록한 풍경을 상상했어. 그럼 부드러운 실로 시간을 잠깐 묶어두는 기분이었어. 종종 나누던 생활에 관한 이야기는 음악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갔어. 마치 그게 일상이고, 밤과 새벽 사이가 전부인 것처럼 진동하기도 했어.
너와 나는 이끼가 되기도 했고 레몬이 되기도 했고 파도가 되기도 했어. 늘어진 비닐이 될 때도, 앞이 보이지 않는 폭우가 될 때도, 불에 데인 꽃이 될 때도 있었어. 사막에 다녀온 날도 있고 달을 만진 적도 있고 볼에 별을 쏟거나 우물에 포도주를 모조리 부어버린 날도 있었지.
이제 너도 나를 발견한 모양이라고 생각했어. 같은 계절이 지나고 또 지나 처음이 되었을 때쯤 말이야. 너는 나에게 불투명한 신뢰를 가지고 있었고 나는 너에게 깜깜한 안정감을 느끼고 있었어. 우리인 적 없는 너와 나는 가늘고 단단한 나뭇가지 하나를 쥐고 있는 모양새였어. 어느 것 하나 완전하지 않았지만 잃을 것도 없는 마음이었지. 그때의 나는 너를 동력으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어. 정신을 차리면 주인 없는 마음이 놓여있었고. 나란히 누워서 너의 얼굴을 쳐다보면 감은 눈가에 늘달무리가 지는 까닭에, 나는 고개를 돌리는 법이 없었어. 그런 날들이 자국처럼 생겨나면서 어떤 때에는 문득 모든 것이 예정된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어.
사실 네 숲에 가는 꿈을 자주 꿨어. 나는 맨발로 달리는 사람이었고 끝이 보이지 않았지.
그렇게 손가락 마디를 짚다 보면 마지막은 네가 온 곳일 거라고 생각했어. 혹시가 아니라 아마도 그럴 거라고, 달리면서 생각했지.
먼지 위로 지문이 쌓였고 어느 날의 나는, 진짜 그곳에 도달했다고 착각해버린 거야. 사실대로 이야기해서 미안해. 불안하고 벅차고 울적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어. 더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중 하나는 너도 마주한 감정일 거라고 생각했어. 안개에 질식하는 사람처럼, 새까만 것으로 온몸을 칠하는 사람처럼 나는 감은 눈을 쳐다봤어.
너의 생활에 내 자리는 영영 없다고, 네가 다짐처럼 선언했지. 나는 거짓말을 엮었고, 오해하려 들었고, 지나치게 많은 것들을 털어놓았어. 뭐라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야. 어째서 너는 처음과 같은 표정으로만 나를 바라볼까. 네가 알지 못하는 것과 모르는 체하는 것의 간극을 해명할 수는 없을까. 수많은 주인공이 너라는 걸 알고 있을까. 묻지 못하는 질문만 늘어갔지.
이제는 알아. 내가 기다리던 시간은 나의 것이 아니라 네가 여기로 오던 너의 시간이기도 하지. 나는 숨을 헐떡이는 사람이고 너는 그 자리에서 기다리는 사람이지. 나무를 조각하지 않고 매만지는 사람이지 너는.
드디어, 너에 대한 오독을 멈춘 거야 나는.
그동안 순서 없이 내버려뒀던 마음들이야. 앞으로 아무 곳에서 아무렇게나 사라질 문장들이야.
출처 잃은 것들은 죄가 없다고 말하면 네가 이해해줄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잖아.
내가 동경한 그 숲에서 오래 머물렀으면 해. 네가 쉴 때는 따듯한 보라색으로 발이 물들었으면 해. 네가 서있을 때는 초록이 무성했으면, 네가 잠을 잘 때는 일렁이지 않는 심연이 찾아왔으면 해. 피지 않는 백합처럼 언제나 너다웠으면 해. 너의 삶을 지탱하는 것들이 네가 되어서 비로소 자유로워졌으면 해. 진심이야.
죽은 고백은 이제 어디든 갈 수 있을 거야.
(10.2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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