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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매

"사랑해야 한다." 사랑을 쓴 로맹 가리는 사랑 없이 자살했다. 어느 날, 안타까운 죽음을 목격하고 사랑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우리는 사랑을 하는데 왜 세계는 부조리로 가득 차 있을까. 사랑이 넘치는 세상에서 주어진 생을 다 살지 못한 채 죽는 건 이상하다. 자의든 타의든.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맞는 현상 이면에는 사랑의 부재가 존재하고 우리는 이를 제대로 보는 통찰을 가져야 한다.

자기애(自己愛): 자존에 대한 부재
그날은 덥고 짜증 나던 하루였다. 상사를 신명 나게 욕하고 집에 들어와 침대에 누웠는데 애달픈 소식을 접했다. 내 또래의 청년이 집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는 뉴스를 봤다. 눈물이 터져 나올 뻔했다. 발견된 원룸 안에는 소주병과 쓰레기가 널브러져 있었다고 한다. 고인은 오랜 기간 실업과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고 보도됐다. 프랑스의 어느 작가는 마약 혐의로 법정에 섰을 때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했다. 마약을 하든 자해를 하든 자신의 신체를 파괴하는 자기 결정권은 개인의 권리라는 것. 그의 극단적 자유주의는 오늘날 자살을 합리화하는 논리로도 쓰인다. 그런데 자살은 자기결정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자살은 자존을 포기하는 행위다. 사랑의 첫걸음은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다. 자아를 긍정하고 돌보는 자기애는 인간 삶에 중요한 기둥이다. 그 중요한 기둥이 무너졌을 때 인간은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내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세상에 자기애는 유지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단순히 개인의 나약함 때문이 아니다.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사랑은 사치로 다가온다. 매일 반복되는 투쟁 속에서 '나를 사랑하라'는 말은 공허한 위로처럼 들린다.

지난 여름에는 고독사에 대한 뉴스가 많았다. 어느 현장엔 돈 천원 하나 없었다고 한다. 주머니에 오만원이라도 있었다면. 아니, 만원이라도 있었다면. 그렇게 쉽게 죽지 않았을텐데. 고인의 옥탑방에는 쓰다 만 이력서가 놓여 있었다. 냉장고는 비어있고, 밥을 먹은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고. 나는 그들의 죽음이 자꾸 생각난다. 돈을 꿔서라도 먹고 싶은 것을 실컷 먹어보지. 편의점에 가보기라도 하지. 어차피 죽을 생각이었다면. 아… 왜 그랬을까. 나의 어린 생각은 여기까지지만 그들은 더 이상 그런 삶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을 사랑할 여유도 없는 이 세계에서 자살은 온전한 자기결정이 아니다. 우리는 진정한 자의가 아니었던 고독한 죽음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인류애(人類愛): 세계에 대한 부재
자신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타인을 사랑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자기애가 결핍된 개인들이 모인 세계는 결국 인류애가 결핍된 세계가 된다. "없는 사람들끼리 돕고 살아야죠"를 말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은 비록 물질적으로 풍족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만은 지금보다 더 넉넉했을지 모른다. 지금은 그런 연대를 잃어버렸다. 사랑이 부재한 세상은 '어떻게 그런 일이…'가 범상하게 일어나는 지옥이 됐다. 나만 잘 살면 된다는 극단적 개인주의는 무관심을 넘어 혐오와 배제를 양산하고 있다.

나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오뎅'에 비유해 조롱한 게시물을 잊을 수 없다. 광화문에서 단식하던 유가족들의 메마른 표정과 오버랩돼 구토감이 몰려온다. 더 놀라온 건 그 글의 '좋아요'가 2만개였다는 것이다. '좋아요'를 누른 이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확언할 순 없다. 하지만 적지 않은 사람이, 어쩌면 주위에 있는 시민이 악이라는 방증이었다. 내 마음은 이렇게 찢어질 것 같은데 저들은 무엇이 즐거운 걸까.

서로가 서로를 혐오하는 사이 강자들의 횡포는 활개를 쳤다. 혐오에서 비롯되는 심리를 잔혹할 정도로 영악하게 이용했다. 성별로 청년들을 갈라쳤다. 노조와 시민단체를 악마화했다. 10월의 어느 날, 이태원에 나갔다 돌아오지 못한 이들에게 날아간 화살은 폄하였다. 인류애의 부재는 혐오를 낳았고 혐오는 결국 괴물 같은 세상을 만들었다. 아, 여기서 문득 의문이 든다. 그러면 나는? 나는 완전무결한 사람인가. 작은 목소리는 힘이 없다. 그런 비겁한 목소리로 어쩌면 그에 일조한 건 아닐까. 지금 쓰는 모든 글이 위선일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는 내 죄를 벌한다. 그저 2014년의 진도와 2022년의 이태원을 떠올리며 그들의 존엄한 죽음을 빌어본다.

온전한 사랑의 실현: 나에서 우리로
로맹 가리는 "사랑해야 한다"고 썼지만 사랑 없이 떠났다. 그가 남긴 문장은 지금도 유효하다. 왜 사랑해야 할까. 답은 명확하다. 사랑은 인간과 세계의 존엄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도덕적 요구가 아니다. 자신을, 타인을, 더 나아가 세계를 사랑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가치다. 온전히 정의로운 세상에 대해선 아직 의문이 남아 있다. 그럼에도 변화의 가능성을 믿어보고자 한다. 사랑이 있어 생명이 태어났다. 생명이 있어 사랑이 태어났다. 이 척박한 땅에서도 거대한 사랑이 피어날 거라 바라본다. 비극을 이제는 끝내야 할 때다. 무수히 남아 있는 안타까운 죽음들을 위해 우리는 자존에서 세계로 확장되는 사랑을 실현해야 한다.

(12.4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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