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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매
돌돌하.
돌고 돌아 하트시그널이라는 뜻.
매년 겨울이 되면 하트시그널을 다시 본다. 송로지옥, 나는 SOLO, 환승연애도 한 번씩은 봤다. 다시 보지는 않는다. 많고 많은 연애 프로그램 중에서 왜 하필 하트시그널만 다시 보고 있을까? 출연자들이 모두 예쁘고 잘 생겨서? 없진 않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다른 연애 프로그램이 출연진들의 커플 성사 여부에 초점을 맞추고 진행된다면, 하트 시그널은 프로그램 제목에 충실하게 출연자들의 '하트 시그널'에 초점을 맞춘다. 누가 누구를 선택해서 최종적으로 커플이 될지 궁금해하며 보기도 했다. 처음에는. 누가 커플이 될지 결말을 알고 나면 더 이상 커플 추리로는 흥미를 느끼기 어렵다. 이제 다시 볼 때는 출연자들의 하트시그널, 순간적으로 생겨났다가 금방 사라져 버리는 빛나고 환하며 찌릿한 그것을 쫓아가게 된다. 거기에 사랑이 있다고 믿으면서.
'그거 다 가짜인데, 왜 봐. 방송 타서 유명해지려고 나온 사람들 아니야?' 언젠가 내가 하트시그널을 본다고 했을 때 들었던 말이다. 구 여자친구가 했던 말이다. (이 글을 읽진 않겠지?) 그 당시에는 왠지 모르게 시무룩 해지면서 '그렇긴 하지... ...' 하며 짤막하게 대꾸 했던 기억이 난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런 대화를 나누고 나서 얼마 안 가 헤어졌다. 내가 하트시그널을 계속 봐서 헤어진 건 아니었다. (그렇게 믿고 싶다.) 남들이 들으면 뻔하다면 뻔한 이유라고 말 할, 그러나 당사자는 벙찔 수 밖에 없는 이유. 넌 나를 진짜 사랑하는 것 같지 않아.
그럴 수도 있다. 내가 그 사람을 진짜 사랑한다고 호소하고 말한들, 당사자가 진짜 사랑을 느끼지 못 했다면 그건 진짜 사랑이 아닐 수도 있다. 하트시그널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금방 사라져버리는 빛나고 환하며 찌릿한 그것을 나만 느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진짜 그런 게 있었나. 구 여자친구와 찍었던 사진은 진작 지웠다. 정말이다. 깨소금 쏟아지던 모습이 담겨있던 영상도 폐기했다. 진짜다. 이제 내게 남아 있는, 남아 있을 빛나고 환하며 찌릿한 그것, '하트시그널'은 지금 만나고 있는 애인과 함께 찍은 사진과 영상에서만 발견된다.
8명의 멋지고 예쁘고 잘생긴 남녀가 모여 한 달 동안 한 집에서 최종 선택 전까지 무한 썸을 탄다. 비현실적인 상황이다.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상황이므로 여기서 진짜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은 허황되었고 인플루언서가 되고자 하는 이들의 가짜 사랑만 엿볼 수 있다는 말이 얼핏 정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출연진들이 정말 사랑을 하고 싶어서 여기에 출연하는지 인플루언서가 되고 싶어서 출연하는지는 알 수 없는데도. 마치 그들의 사랑이 진짜가 되면 자신들이 하는 사랑이 가짜가 되기라도 하듯.
이는 우리가 지금 하는 사랑을 보다 진짜로 만들기 위해 과거에 했던 사랑을 가짜로 만들려는 감정과 일맥상통하지 않나. 지금 만나고 있는 애인과 나누며 부풀리고 풍성해지는 사랑이 진짜지만, 그렇다고 과거에 있었던 사랑을 돌이켜 봤을 때 느껴졌던 빛나고 환하며 찌릿한 하트시그널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출연진들은 최종 선택 전까지 매일 그 날 가장 마음에 들었던 출연진에게 익명으로 문자를 보내야 한다. 일관되게 한 사람에게만 보내는 사람도 있고, 그 날 데이트를 한 사람에게 예의상 보내는 사람도 있고, 자기 마음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지 갈팡질팡하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보내는 사람도 있다. 이런 비현실적인,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상황 속에서 진짜 사랑이 탄생할 수 있는가. 난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비현실적이고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상황에서 진짜 사랑이 탄생할 확률이 더 높다고 여긴다. 사랑은 애초에 자연스럽지 않다. 특히, 부모가 전한다는 절대적인 사랑(여기도 얘기할 게 많지만, 분량상 압축해서 전한다. 이또한 부자연스럽긴 하다.)이 아닌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사람이 만나서 생기는 사랑은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 부자연스럽다. 다만, 자연스럽다고 믿고 싶어 한다. 그래야 지금 하고 있는 사랑이 진짜 사랑 '처럼' 느껴지니까.
어느덧 마지막 화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누가 누구랑 커플이 되고 안 되고는 적지 않겠다. 하트시그널에서 내가 진짜 사랑과 가짜 사랑의 구분이 무의미함을 발견했듯 당신도 발견했으면 좋겠다. 진짜 사랑과 가짜 사랑의 구분 너머의 빛나고 환하고 짜릿한 그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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