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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다고 하기는 좀 그래서>

워낙 버리지 못하는 성격이다. 여전히 매만지다 보니 다음에 쥐어야 할 것을 놓친 걸까. 느리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아직은, 아직은, 하다 보니 걸음이 더뎌진다. 아쉬운 마음은 대체 익숙해지지 않는다. 매만진 곳이 매끈해진 것도 아니다. 여전히 거칠고, 때로는 긁힐 것처럼 거칠어 한숨이 샌다. 그나마 숨을 길어서 내뱉고 나면 주변을 살핀다. 앞뒤 걸음을 잰다. 묵직하게 매만지는 것들을 잊은 마냥 다리를 뻗어낸다. 꼭꼭 눌러내는 발자욱은 아니더라도 비슷한 것 같다. 방심한 순간 엉거주춤하지만 않는다면.

그럴 생각은 없었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 연애 상담을 하는 건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그 상담을 상담 선생님에게 하기엔 왠지 쑥스러웠다. 검정색 1인 소파에 걸터앉아, 이 손으로 저 손 검지를 쥐었다 놨다 하며 겨우겨우 말을 이었다. 만나는 사람이 생겼어요. 한 달 정도 됐는데요. 멀리 있어요. 선생님의 펜이 빠르게 움직였다.

혼자 사는 건 별일 아니다. 식사 다음 설거지, 빨래 널기 다음 개기, 이어지는 가사와 돌아오는 끼니를 대수롭지 않게 넘겨낸다. 그러다가 가끔 아이를 키우는 친구를 만나 점심을 먹으며 집안일은 끝이 없다는 말로 느슨하게 공감대를 형성한다. 사랑스러운 아이 사진을 보며 언제 이렇게 시간이 지났나 셈해본다. 나는 그사이 어떤 것을 사랑스러워했나 얼핏 떠올려보다가 계산대로 향하는 친구를 말린다. 20대 때는 주문서를 가지고 실랑이를 하던 어른들이 마냥 신기했다. 이제는 밥을 사며 마음을 표하는 법을 안다. 차까지 멀지 않지만, 친구의 아이를 안고 짐가방을 들어주며 가벼이 보답한다.
벌써 12월이다. 해가 가고 오는 것을 아쉬워하고 반기는 마음도 삼십 년께 살다 보니 근육이 붙었나 보다. 송년회나 신년회를 하자던 분주한 메시지도 찾아보기 힘들다. 권태롭게 움직이는 근육에 자극이 되는 건 돈이다. 친구들과 모은 곗돈으로 근사한 와인바에 가기로 했다. 1년 동안 조금씩 모인 돈은 우리 피땀이 아니라 어디서 떨어진 돈 같다. 무엇을 보상받아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먹고 싶은 걸 죄다 주문함으로 위로를 받았다. 와인 잔 속 뽀글뽀글 올라오는 기포가 간접 조명에 비쳤다.
“나 결혼해.”
달그락거리던 식기 소리가 멈췄다. 몇몇은 소리를 지르고 나머지는 얼이 빠졌다. 예상치 못할 시기는 아니지만, 집안 반대로 몇 년간 고민하던 친구라 드라마처럼 반응하게 된 것이다. 잠깐의 정지 후 질문이 쏟아졌다. 어떻게 허락받았냐, 오빠 반응은 어땠냐, 식장은 정했냐, 애기도 낳고 말하겠다는 비아냥까지 퍼붇고는 축하의 말을 전하며 기분 좋게 잔을 부딪쳤다. 그룹에 속한 친구들은 내년 중 모두 기혼이 될 예정이다. 한참 결혼 이야기가 이어지다, 친구 하나가 기한을 정해 축의금을 주겠다고 했다. 내심 축하받을 일 없는 1인 가구의 경조사비를 계산해오던 요즘이었다. 50살 정도 어떠냐고 웃어넘겼다. 언제쯤, 보다는 하겠나, 쪽으로 혼자 물었다.

서른 중반을 지나 보내는 우리 중 대부분은 연애 관계를 오래 이어왔거나 결혼을 해치웠다. 연애 이야기를 꺼내면 돌아오는 말은 ‘좋을 때다, 부럽다, 결혼하지 마라’ 였다. 가끔 앵무새처럼 되 말하고 싶었다. 좋을 때다, 부럽다, 결혼하고 싶다, 혹은 결혼 물러라. 차마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 입안에서 공글리는 말이 많아지는 동안 고민의 무게를 달았다. 남편이 돈은 잘 벌지만, 건강도 육아도 뒷전. 고민. 5년 동안 만난 남자친구가 미래 이야기만 하면 회피. 고민. 남들이 내놓는 고민을 저울에 놓고 중량을 달다 보면 이런 말들은 꼴깍 삼키고 만다. 벌써 좋아지고 말았는데 장거리 연애를 해야 해, 표현을 잘 안 해서 좋은지 싫은지 잘 모르겠어, 미래를 그려야 할지 불안해, 금방 흩어질 것 같은 문장을 하나씩 떠올리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이유를 찾았다. 마음대로 할 거니깐. 연애는 그러는 거다. 친구들도 그래 왔으니 해줄 말이 없었을 거다. 그래도 내가 결혼했다면 그렇게 답하진 않았을 텐데. 학창시절부터 20대까지 신명 나게 이성 이야기를 해온 친구들이다. 이사할 때 내놓는 상자처럼 주제를 닫아버렸다. 취급 주의 스티커 위에 ‘버릴 거’라 써 갈겨서 말이다.

(10.3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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