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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목: 사랑이 아니라고 해봤자
/ 사랑한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라고
/ 사랑했다는 말
뜨거운 밤. 내려다 보는 얼굴이 예쁘다. 나는 네가 안경을 벗은 모습을 좋아한다. 네 왼손은 내 오른쪽 어깨를 누른다. 나는 오른손으로 네 팔꿈치를 쓰다듬는다. 몸을 쓰러트리며 네가 말한다.
"내 거야."
순간 몸의 온도가 1도쯤 내려간다. 대답 대신 등을 끌어안는다. 움직이는 날개뼈를 손가락 끝으로 만지작거린다. 단단한 피부. 내 것이 아닌 피부. 남의 것이다.
천장을 보며 몇 번 숨을 내쉬다가, 곁눈질로 네 귓속을 들여다본다. 귓속에 어둠이 있다. 무슨 말이든 집어삼킬 것 같다. 있잖아.
나, 왜 그 말이 싫지.
몸의 온도가 0.2도쯤 더 내려간다. 집중 좀 하라는 핀잔을 끝으로 사랑은 멈춘다. 끈적하고 차가운 등허리에 뜨거운 이마를 갖다댄다. 치익- 소리가 날 것만 같다. 들리지 않게 입술만 달싹거린다.
'내가 왜 네 거야?'
있잖아, 나. 그 말이 싫어. 네 것이 되는 게 싫어. 사랑은 부담스러워. 대답을 요구하는 사랑이 싫어. 소유를 동반하는 사랑이 싫어.
돌아누우려는 네 등을 끈질기게 끌어안는다. 지금 네 눈을 보면 나는 나를 잃어버릴 것 같다.
"왜 사랑한단 말을 안 해?"
목이 꽉 막힌다. 밥 먹을 때 이런 얘기는 안 했으면 좋겠다. 안 할 수도 있지. 맨날 사랑한다고 말할 필요는 없잖아. 얼버무린다.
"한 번도 안 하잖아."
속으로 한숨을 삼키면서 숟가락을 놓는다. 아니야, 사랑해. 사랑한다니까 좋아? 사랑한다니까 오히려 불안하지 않아? 악의적인 질문은 아니야. 말이 끊어지지 않도록 급하게 내뱉는다.
"응, 좋아. 나도 사랑해."
담백한 네 대답에 오히려 마음이 무너진다. 나는 네 표정이 굳기를 기대했나보다. 그저 쳐다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사랑한다는 말은 듣기도 좋지만, 말하는 사람도 기분 좋은 말인 것 같아.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게..."
마음이 돌처럼 무거워서 새벽까지 잠에 들지 못했다. 도망갈 곳이 없었다. 이젠 내 입에서 나오는 '사랑해'도 진심이 되어야만 했다. 나도 모르게 초조했다.
네가 잠이 들자마자 등을 돌려 누웠다. 사랑이라는 말을 줄곧 피해왔다. 나도 안다. 널 좋아하지만, 사랑한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라고. 그러니 너도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라고.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내가 나를 깐다.
일단 일어나자. 함께 누운 침대에서부터 벗어나기로 한다. 몸을 일으킬 때마다 너는 내 팔을 붙잡는다. 팔을 붙잡다가 그 다음에는 허리를 끌어안는다. 숨소리가 잔잔하다. 너는 깨지 않았다. 잠결에도 나를 붙잡는 네 마음은 대체 뭘까.
나가고 싶은데 놓아주질 않는다. 고개를 돌려 잠든 네 얼굴을 가만히 본다. 그냥 깨우기로 한다. 잠든 네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갖다댄다. 쪽. 쪽. 일부러 소리내보지만 살짝 인상을 찌푸릴 뿐 깨지 않는다.
다시 너를 가만히 본다. 속눈썹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려본다. 건드릴 때마다 눈을 질끈 더 감는다. 가슴팍에 가만히 귀를 댄다. 쿵. 쿵. 심장이 참 강하게 뛰는구나 하고 평소에도 생각했다. 유난히 조용한 새벽이라서일까. 네 심장소리가 방 안 가득차는 듯했다.
이번에는 목에 가슴에 허리에 입을 맞춘다. 더듬거리는 손은 깍지를 껴 잡았다. 끄응-하고 뒤척이며 네가 눈을 뜬다. 너는 눈도 다 못 뜬 채로 나를 끌어다 안는다. 이마에 붙은 머리칼을 넘겨주며 입을 맞춘다. 참으로 달콤한 시간이다.
잠든 너를 보면서 책상에 앉아 조용히 편지를 써나갔다. 한 문장, 또 한 문장. 이별을 고했다. 이 편지를 끝으로 도망치기를 선택한다.
서준아, 나의 서준아.
조금은 짐작하겠지만 이렇게 지낼 순 없어.
지난 밤 나의 이기적인 말들만 토해내서 정말 미안해.
하지만 늘 그랬듯 그저 내가 이기적인 사람이라 생각해주면 안 될까.
이기적이지만 나만을 위한 선택이 아님을 알아주길 바라.
건강한 음식을 먹고 건강한 마음으로 행복한 삶을 이어나가길 바랄게.
다시 불러보는 서준아.
너는 너의 생각보다도 훨씬 사랑스러워.
세상엔 갚지 않아도 될 애정들이 생각보다 많음을 한번씩 꼭 생각해주길 바랄게.
행복과 행운이 항상 함께 하길.
너를 사랑했던 이가.
한심했다. 편지의 내용은 몇 번을 봐도 한심했다. 도망치고 싶으면서 좋은 사람으로도 남고 싶어 구구절절 쓴 문장들이 한심하고 또 한심했다.
특히 마지막이 그랬다. '너를 사랑했던'이라니. 사랑한다는 말은 나오지 않으면서, '사랑했던'이라는 말은 이토록 쉽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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