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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고2

하트시그널에서 진짜 사랑 찾기

돌돌하.
돌고 돌아 하트시그널이라는 뜻.
매년 겨울이 되면 하트시그널'만' 다시 본다. 솔로지옥, 나는 SOLO, 환승연애. 이런 연애 프로그램은 다시 보지 않는다. 많고 많은 연애 프로그램 중에서 왜 하필 하트시그널만 다시 보게 될까?
다른 연애 프로그램은 출연진들의 커플 성사 여부에 초점을 맞추고 진행된다. 누가 누구랑 이어지는지를 집중적으로 그려내면서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하트 시그널은 다르다. 프로그램 제목에 충실하게 출연자들의 '하트 시그널'을 파악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N회차에서 두드러지게 보이는 특징일 수도 있다. 나도 처음에는 최종적으로 누가 커플이 될지 궁금해하면서 보기도 했다. 처음에는. 누가 커플이 될지 결말을 알고 나니 N회차 시청에서는 더 이상 커플 추리로는 흥미를 느끼기 어려웠다. 대신 출연자들의 하트시그널, 순간적으로 생겨났다가 금방 사라져 버리는 빛나고 환하며 찌릿한 그것을 쫓아가게 된다. 거기에 사랑이 있다고 믿으면서.
'그거 다 가짜인데, 왜 봐. 방송 타서 유명해지려고 나온 사람들 아니야?' 언젠가 내가 하트시그널을 본다고 했을 때 들었던 말이다. 구 여자친구가 했던 말이다. (이 글을 읽진 않겠지?) 그 당시에는 왠지 모르게 시무룩 해지면서 '그렇긴 하지... ...' 하며 짤막하게 대꾸했던 기억이 난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런 대화를 나누고 나서 얼마 안 가 헤어졌다. 내가 하트시그널을 계속 봐서 헤어진 건 아니었다. (그렇게 믿고 싶다.) 남들이 들으면 뻔하다고 할법한, 그러나 당사자는 벙찔 수밖에 없는 이유. 넌 나를 진짜 사랑하는 것 같지 않아.
그럴 수도 있다. 내가 그 사람을 진짜 사랑한다고 호소하고 말한들, 당사자가 진짜 사랑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건 진짜 사랑이 아닐 수도 있다. 하트시그널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금방 사라져 버리는 빛나고 환하며 찌릿한 그것을 나만 느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진짜 그런 게 있었나. 구 여자친구와 찍었던 사진은 진작 지웠다. 정말이다. 깨소금 쏟아지던 모습이 담겨있던 영상도 폐기했다. 진짜다. '하트시그널'은 지금 만나고 있는 애인과 함께 찍은 사진과 영상에서만 발견된다. 이러한 발견조차도 상상과 짐작의 영역에 가깝디. 오로지 애인과 함께 있는 그 순간에만 사랑을 감각할 수 있다. 순간은 붙잡히지 않아서 감각한 사랑도 보관이 되지 않는다. 그때그때 재생산하면서 불완전하게 이 사람을 사랑하는 과거를 증명해 나갈 수밖에 없다.
하트시그널로 돌아오자. 하트시그널 프로그램을 한 마디로 함축하자면 이렇다. 8명의 멋지고 예쁘고 잘생긴 남녀가 모여 한 달 동안 한집에서 최종 선택 전까지 무한 썸을 탄다. 비현실적인 상황이다. 여기서 진짜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은 허황되었고 인플루언서가 되고자 하는 이들의 가짜 사랑만 엿볼 수 있다는 말이 얼핏 정답처럼 들린다. 하지만 출연진들이 정말 사랑을 찾고 싶어서 여기에 출연하는지 인플루언서가 되고 싶어서 출연하는지는 알 수 없다. 시청자들이 보게 되는 영상은 편집된 영상이므로 출연진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제작진의 의도대로 감정이 보이도록 연출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런데 이러한 연출을 현실에서의 사랑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더 사랑받기 위해 자신을 연출한다. 의도적으로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은 두둔하면서 제작진의 의도를 붙잡고서 이 프로그램이 가짜 사랑을 끌어내는 프로그램이라는 셈법도 억지스럽다고 여긴다. 앞서 말했듯 사랑은 순간. 그리고 사랑이 순간이라면 사람은 그 순간 이후에는 모두 가짜 사랑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출연진들은 최종 선택 전까지 매일 그날 가장 마음에 들었던 출연진에게 익명으로 문자를 보내야 한다. 일관되게 한 사람에게만 보내는 사람도 있고, 그날 데이트를 한 사람에게 예의상 보내는 사람도 있고, 자기 마음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지 갈팡질팡하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보내는 사람도 있다. 문자를 보내는 그 순간만큼은 그게 '진짜'라고 느낀다. 문자를 보내고 난 이후에는 출연진들이 괴로워하는 장면이 자주 잡힌다. 자신이 진짜 하트 시그널을 보내고 싶은 사람에게 보냈는지를 의심해서 괴로워하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한집에 사는 사람들과 하트 시그널을 매번 주고받는 일 때문에 껄끄러워지기 싫어서 괴로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비현실적이고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상황에서 진짜 사랑이 포착될 확률이 더 높다고 여긴다. 사랑은 애초에 자연스럽지 않다. 특히, 부모가 전한다는 절대적인 사랑(여기도 얘기할 게 많지만, 분량상 압축해서 전한다. 이 또한 부자연스럽긴 하다.)이 아닌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사람이 만나서 생기는 사랑은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 부자연스럽다. 다만, 자연스럽다고 믿고 싶어 한다. 그래야 지금 하고 있는 사랑이 진짜 사랑 '처럼' 느껴지니까. 그럼,
언젠가 사랑에 대해 힘차게 말하던 친구의 눈빛. 거기에 사랑이 깃들어 있나. 바닥에 불규칙적으로 흥건하게 떨어진 마른 잎들을 비질로 모아 만든 하트. 거기에 사랑이 모여 있나. 귀 끝이 잘릴 것 같고, 손끝이 저릴 정도로 추워도기어이 거리로 나와 흔들리는 응원봉. 거기에 사랑이 빛나고 있나.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영영 잃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껴안은 몸에서 발생하는 열기. 거기에 사랑이.
진짜 사랑이 있나.
넌 나를 진짜 사랑하는 것 같지 않아. 그렇지. 나도 네가 나를 진짜 사랑한다고 믿지는 않았다. 단지, 네가 나를 바라봐주고 안아주는 순간만큼은 '진짜 사랑'이 느껴졌다고, 기억한다. 지금은 애인과 '진짜 사랑'이 느껴지는 순간이 무수하게 많아지고, 한없이 귀하나 과거에 느꼈던 '진짜 사랑'을 '가짜 사랑'이라 치부하고 싶진 않다.
어느덧 마지막 화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누가 누구랑 커플이 되고 안 되고는 적지 않겠다. 하트시그널에서 내가 '진짜 사랑'과 '가짜 사랑'의 구분이 무의미함을 발견했듯 당신도 발견했으면 좋겠다. '진짜 사랑'과 '가짜 사랑'의 구분 너머의 빛나고 환하고 짜릿한 그것을.

(14.8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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