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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전3
<행운의 인식>
‘4=3+1’
위 공식에 의거합니다. 네잎클로버 만들기 공식. 3은 4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라 볼 수 있습니다. 세잎클로버인 3, 행복입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1? ‘운명’ 혹은 ‘우연’이나 이는 뒷부분에서 다루겠습니다.
돈과 행복의 관계, 다들 알고 계십니까? 행복하기 위해선 일정 이상의 돈이 필요합니다. 행운과 행복도, 그렇게 다르진 않답니다. 우리는 행운을 인식합니다. 일정 이상의 ‘행복도’ 아래에서 말입니다.
인간의 행복 1~10단계
1~2 : 삶을 지속하기 힘든 불행의 상태
3~4 : 삶을 지속할 수 있는 불행의 상태
5 :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상태
6~7 : 삶을 지속하며 에너지를 남길 수 있는 상태
8~9 : 에너지를 많이 남길 수 있는 상태
10 : 매우 큰 행복에 빠져 있는 상태
(에너지는 기분, 행복 등의 집합임을 알아두십시오. 단, 에너지 그 자체의 의미도 가집니다.)
사람들은 평균 3~7단계, 범위 안에 위치합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에너지의 수를 5라고 가정했을 때, 보유 에너지는 -2~2입니다. 이제 인식을 끌고 옵니다. 인식 또한 에너지 소모 행위입니다. 행운은 그 크기가 매우 다양합니다. 그렇기에 어떠한 것은 관찰을 통해 존재를 인식합니다. 관찰과 인식, 에너지 소모 행위입니다. 수치화는 불가합니다. 그럼에도 -가 된다는 것은 확실히 답합니다. 그러니 보유 에너지가 양수여야, 그 행위가 가능하다 말할 수 있겠습니다.
6단게 이상부터 시작합니다. 예시를 들어보갰습니다. 저는 오늘, 일찍 일어난 탓에 평소보다 일찍 강의실에 도착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행운입니다. 하지만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나의 불행요소 : 시험기간, 2시간도 안 되는 수면시간, 과제 및 발표준비
그렇습니다. 이 세 가지 요소로, 저는 지금 3~4단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것은 의무입니다. 보험금과 비슷합니다. 그렇기에 제게 지금 남은 에너지는 없습니다. 갈증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강의실에 일찍 도착하는 것? 엄청난 행운도 아닙니다. 그러니 불행의 그림자 안에 위치합니다. 저는 지금이 아닌, 충분한 수면시간 (불행요소 중 하나를 제거) 을 가질 때,
‘아, 나 오늘 강의실 일찍 간 거 참 다행이었네. 그 교수님 지각도 안 봐주시는데.’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어느 정도 에너지가 생긴 후, 행운을 인식한다는 것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렇다면 행운은 행복의 충분조건 아닌가?’
위 질문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4의 안에 3이 존재하는 것은 지당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세잎클로버에게 잎 하나를 붙여주는 것과, 네잎클로버의 잎 하나를 떼는 것의 차이를 말입니다. 후자는 제법 잔인하지 않습니까? 이 차이가 ‘틀린 부분’을 만들어냅니다. (잔인함이라는 단어에 집중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예를 들어봅니다. 로또 1등을 가정해 봅시다. 이는 행운이자 행복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됩니다. 이는 큰 행운이기에, 행복을 불러일으키는 충분조건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상해 보십시오. 길에 5만 원이 떨어졌습니다. 당신은 그를 주움으로써 행복하다 말할 수 있습니까? 한 가지 추가합니다. 현재 직장 스트레스가 많습니다. 그 직장에 출근하는 중 행운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지만 그 5만 원, 퇴사를 고민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과연 행복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질문의 명제는 힘을 잃습니다. 위 문단은 ‘충분조건’의 완전성을 깨트립니다. 그렇다면 이제 ‘필요조건’의 완전성을 입증해 보겠습니다. 가격을 더 깎습니다. 길가에 5천 원이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적성에 맞는 일과 좋은 인간관계로 행복한 상태입니다. 당신은 5천 원을 발견합니다. 그럼 무엇이라 생각하시겠습니까?
‘헉, 5천 원이다. 럭키-’
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이게 바로 차이입니다. 행복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저 행운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행운은 잠시, 또다시 불행에 먹히지 않겠습니까? 더군다나 크기도 작습니다. 고작 5천 원이니, 더더욱 먹히기 쉽겠습니다.
결론을 정리합니다. 행복이 선행되는 상태에서, 인간은 비로소 행운을 인식합니다. 행운답게, 아름답게 말입니다. ‘4=3+1’의 공식, 기억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행운은 운명인가?>
운의 이름을 불러보세요. 운-명 혹은 우연, 이분법적 시선으로 봤을 땐 그렇습니다만. 그 사이 어딘가, 주목할 곳이 있습니다. 흐릿하게 보이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ㅇ, ㅜ, ㄴ, ㅁ, ㅕ, ㅇ / ㅇ, ㅜ, ㅇ, ㅕ, ㄴ
운명과 우연을 해체하면, 운명은 우연을 품어줍니다. 우연, 인간이 잡지 못할 대단함. 대체 운명이 무엇이길래 대단함을 품고 있을까요. 자유의지와 같습니다. 무언가에 종속되어 한껏 소심해지니까. 르봉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무의식에 갇힌 존재, 정해진 운명일까요. 혹은 반대일까요.
언젠가 그에게 질문했습니다. 이성이 무의식을 벗어나라- 고 합니다. 그 이름은 무엇입니까. 이성? 무의식? 텍스트는 대답하지 않습니다. 추측할게요. 무의식이라 하겠지요. 당신은 운명론자? 다만 무의식도 변하지요. 그렇다면 운명도 변한답니까.
‘우리는 소극적 자유만 부릴 수 있지. 적극적 자유는 저 위 어딘가- 글쎄, 신의 것일까.’ ‘인간은 완전한 자유를 얻을 수 없을까.’ ‘애초에 인간이 만든 단어에 완전함이 어딨어.’
친구와의 통화, 완전한 자유가 불능하듯이 완전한 우연도 그렇습니다. 운명은 적극적 자유와 같아, 우리보다 신의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운명이라 부를랍니다. 딱히 멋있지는 않고, 운명이 먼저 태어났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결론에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 그것만큼 무책임이 또 있습니까. 이분법적인 사고를 지닌 분들께 ‘운명’을 안겨드립니다. 우연보다는 운명에 더 가깝습니다. 우연은 곧 희망, 정해진 것 없다는,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헛된 희망. 저는 이분법적 사고를 싫어합니다. 그러니 더 찾아봐야지 않겠습니까. 더 확실한 대답, 우연의 산물, 혹은 운명의 것. 어느 쪽에 해당될까요?
(15.0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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