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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전4
세상에서 가장 운 좋은 남자의
사촌인 에덴 크루디의 경우
계좌에는 122,320파운드가 찍혀 있었다. 원래 계좌에 들어있던 2,320파운드를 빼면 100,000파운드가 계좌로 들어온 셈이었다. 젠장, 결국 내 말을 안 들었군. 나한테 300,000파운드만 맡기면 두 배로 불려준다니까. 멍청이 천지들인 가족들한테 돈을 왜 나눠준 거야. 내가 계좌 내역을 보며 분해하자 아내가 나를 위로했다. 그래도 이게 어디예요. 일단 이 돈으로 급한 빚부터 갚는 것이 좋겠어요. 분명 아내의 조언은 현실적이었다. 사촌에게서 받은 100,000파운드면 급한 불은 끌 수 있었다. 하지만 가지고 있던 2,320파운드까지 합쳐도 그 정도의 돈으로 불을 완전히 끌 수는 없었다. 나에게는 이것저것 다 합쳐서 250,000파운드의 빚이 있었으니까. 122,320파운드를 다 쏟아부어 빚을 갚는다고 해도 127,680파운드의 빚이 남는다.
그 빚을 다 갚으려면 나는 죽을 때까지 공장에서 나사를 조여야 한다. 어디에 쓰이는지도 모르고 금방이라도 쪼개질 것 같이 녹슨 나사는 아무리 조여도 줄지 않았다. 끊임없이 다음 나사가 내가 조여주기를 기다리면서 컨베이어 벨트를 통해 밀려 들어왔다. 징그럽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는 내가 죌 나사가 줄지 않아서 다행이기도 했다. 언젠가 내가 죌 나사가 컨베이어 벨트를 통해 더는 나오지 않는다면 회사에서 쫓겨날 게 분명했다. 어쩌면 지금 내게 남아있는 행운 중 큰 조각을 차지하는 것이 이 일일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가 행운을 산다고 했을 때 팔지 말아야 했다.
나사를 죈다고 해도 빚을 다 갚을 수 있을지는 불분명했다. 내가 가진 행운으로 내가 만든 빚과 대적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내가 나사를 죄며 풀타임으로 일하면 버는 돈은 220파운드 정도였다. 심지어 최근 몇 달간은 회사가 어려워져 풀타임으로 일하지도 못했다. 아내와 함께 살며 아무리 생활비를 아껴도 한 달에 150파운드는 지출해야 했다.
빚은 자신을 뜯어 먹으면서 증식하는 괴물이었다. 괴물과 대적하기 전에는 괴물과 대적할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하지만, 막상 괴물은 나와 대적할 생각이 없었다. 괴물은 어떻게든 나를 파멸시키고 싶어 했다. 생활을 헤집고 삶의 목표를 흐리게 만들었다. 일단은 자신의 배를 채우라고 닦달했다. 네가 나를 만들었으니 억울해하지 말라고도 일렀다. 맞는 말이었다. 이러다 나사 대신 내 목을 조르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나에게는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나를 떠나지 않은 사랑스러운 아내와 매일 산책하러 가자고 조르는 강아지 도리무가 있었다. 유기농 사료가 아니면 먹지 않는 도리무. 사람 나이로 치면 아흔이 넘어 석 달에 한 번씩은 동물병원을 찾아야 하는 도리무. 방법을 찾아야 했다.
10만 파운드를 나에게 준 사촌은 세상에서 가장 운 좋은 남자로 알려져 있었다. 그의 최측근까지는 아니지만, 꾸준하게 그의 행적을 지켜본 바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그보다 운이 좋은 사람을 본 적 없었다. 수차례의 열차 탈선에도 타박상과 골절을 제외하고는 생명에 지장이 없었다. 배가 침몰할 때도 그가 타고 있던 구명보트만 뒤집히지 않고 떠올라 살아남았다. 치사율이 높은 전염병이 창궐했을 때도 그는 감염되었었지만, 죽지는 않았다. 내가 봄마다 기침하게 된 것과 달리 그는 가벼운 후유증도 없었다.
그의 목숨을 가장 위협한 건 벼락이었다. 막대한 양의 비와 강풍이 예정되어 있으니 꼼꼼히 대비해야 한다는 예보와는 달리 비는 오지 않고 먹구름만 가득했던 날, 그는 고장 난 자동차를 직접 수리하기 위해 자동차 보닛을 열고서 엔진을 살펴보는 중이었다. 갑자기 그의 주변으로 수차례의 번개가 연속으로 떨어졌고, 그중 하나의 번개를 직방으로 맞아 한 달 동안 혼수 상태로 병상에 눕게 되었다. 의사는 가망이 없다고 했다. 가족들도 반쯤 포기하고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그가 살아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는 토르의 피를 이어받았는지 거짓말처럼 혼수상태가 된 지 32일째 멀쩡하게 일어났다. 현대 의학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의사는 말했다. 그저…… 정말로 운이 좋았습니다. 이후에 그를 중심으로 다큐멘터리-다큐멘터리는 제작비가 부족하여 결국 무산되었다-를 만들기 위해 제작자들이 자문하던 중 그가 벼락을 맞을 때 차의 보닛을 짚고 있어서 몸을 강타했던 번개가 손끝을 타고 보닛을 통해 흘러 들어가 그가 살아날 수 있었다는 가설을 세웠지만,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의 일을 보상이라도 받듯 복권에 당첨되었다. 꾸준하게 복권을 사던 사람도 아니었다. 그의 아내가 심부름을 시켜 간 동네 슈퍼에서 잔돈으로 얼결에 산 복권이었다. 동네 언론사에서 시작해 SNS를 통해 입소문이 난 그의 사연은 삽시간에 많은 사람의 이목을 끌었다. 드라마도 이렇게 만들면 욕먹는다. 무슨 악마와 계약한 거 아니냐. 운이 이렇게 좋은 거면 다른 사람한테 운을 산 거 아니냐. 당사자의 입장과는 무관하게 댓글을 통해 갑론을박이 이어졌고, 언제나 그렇듯 다른 이슈에 의해 그의 사연은 자연스럽게 잊혔다. 이후에도 콘텐츠를 찾는 크리에이터들이 간간이 유튜브 쇼츠로 그의 사연이 축약하여 만들었다. 그럼 내가 댓글을 달곤 했다. 운이 이렇게 좋은 거면 다른 사람한테 운을 산 거 아니냐.
몇 년 전에 불쑥 그가 만나자고 연락을 해왔다.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하자면서도 서로에게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일 테니 걱정은 하지 말라고 덧붙였다. 그와 사촌이기는 했으나 주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지는 않아서 그가 만남을 요청해 왔을 때 갸우뚱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가 크고 작은 사고를 겪은 후였는지 그 전이었는지 아니면 겪고 있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그때 나는 도박할 돈이 필요했다. 여차하면 그에게 돈을 빌릴 심산으로 약속 장소로 향했다. 그와 오랜만에 만나 어색해하는 나와 달리 그는 마치 어제 나를 만나 맥주라도 한잔했던 사람처럼 능숙하게 나를 대했다. 근황을 묻고, 이번 여름에 다녀왔다는 여행지 사진을 보여주고, 거기서 사 왔다는 특산품을 선물이라며 내밀었다. 예쁘게 포장된 디저트였다. 아내가 좋아할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그럼, 이제 본론을 얘기할까요. 서로에게 도움 되는 내용의 얘기요.”
그가 편하게 앉아 있던 자세를 고쳐 잡았다.
“에덴, 당신의 운을 사고 싶어요.”
“얼마…… 아니, 그런데 운을 산다고 살 수 있습니까?
장난을 치는 눈빛은 아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거래 방법은 간단하다고 말한 뒤 가방에서 종이를 꺼내 내게 보여줬다. 종이는 A4 용지 크기 정도 되어 보였고, ‘내가 가진 운을 눈앞의 사람에게 판매하겠습니다. 판매 가격은____입니다’라는 문구가 프린트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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