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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전4
행운... 잘 모르겠네요.
로또 1등. 연금복권 당첨.
나이 들수록 제법 디테일해지는 소원.
3년간 아무도 당첨되지 않은 로또, 나 혼자 1등.
법적으로 문제 없고 깨끗한 돈으로 소소하게 세후 3억 정도만 누가 줬으면.
부자가 유튜브 콘텐츠 찍는답시고 나한테 오백만 원만 줬으면.
다음 생, 재벌 1세 자식은 힘들게 살 것 같으니 재벌의 사랑받는 고양이로 태어나기.
학원에서의 고등학생 제자
“쌤, 누가 저한테 큰 돈 주고 일 시켜줬으면 좋겠어요.”
“헐. 나는 그냥 큰 돈 줬으면 좋겠는데.”
“쌤... 그거 너무 욕심....”
소원은 크게 빌어라, 인마.
초고고 뭐고 오늘 새벽까지 일정이 꽉 차 있는데, 20매가 막막해서 여러 사람에게 행운 하면 뭐가 생각나는지 여쭤봤습니다. 이걸 실전1 때 했어야 했나 싶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친한 동생과의 술자리를 상상하라 하셨죠. 오늘 하루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보고, 틈날 때마다 SNS로 20매 채울 때까지 묻고 다녔습니다.
돌아온 첫 답장. 토끼 발
아니. 생각해보니 왜 토끼발이 행운의 상징이지. 심지어 찾아보니 그냥 잡는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뭔 보름달이 떠야 하니 비가 와야 하니 금요일이어야 하니 은탄을 쏴야 하니 죽기 전에 잘라야 하니 등 과정도 복잡하네요. 행운이 도대체 뭐길래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요. 무엇을 믿고 싶고 무엇을 얻고 싶어서 이런 속설까지 만들어진 걸까요. 그렇게까지 간절하게 바라는 행운이 있다는 건지, 뭔지도 모르는 행운을 막연하게 바라는 건지. 토끼발이 아니라 네잎클로버가 훨씬 유명해서 천만다행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토끼발을 가지고 다니는 건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네요...
“따봉도치야 고마워”
아시는 분들도 있고 모르시는 분들도 계실 인터넷 밈입니다. 누가 따봉하는 고슴도치 이미지를 올리고, ‘따봉도치야 고마워’라고 답장을 하는 사람에게 행운이 있을 거라고 한 글이 유래입니다. 파생으로 본인이 좋아하는 캐릭터나 인물의 이름을 넣어 ‘따봉00아 고마워’로 돌아다니기도 합니다. 이것도 하나의 행운의 상징이겠네요. 심지어 나의 행운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가져다준다니, 두 배로 좋네요.
2달러 지폐
행운의 상징이 계속 나오네요. 도대체 다들 얼마나 잘 되고 싶은 건가요? 누가 자꾸 이렇게 행운 부적을 만들고 다니는 거야. 2달러 지폐는 1달러 두 장이면 되니까 사실 이용 가치가 크게 있지 않아서, 발행량이 적어지는 바람에 희소성으로 행운의 상징이 되었다고 하네요. 그러네, 2달러는 누구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야.
행운의 숫자 7, 777(잭팟)
이건 유래가 하나만 있다고 하기보다는 정말 많은 문화적, 숫자적 이유로 각자의 행운의 뜻이 다 다르게 붙어 있네요. 다방면으로 7이라는 숫자가 좋은 의미를 품고 있어서 각자의 이유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대표는 대표인 이유가 있네요. 겸사겸사 굳이 찾아보지 않았던 별의 별 유래를 다 찾아보고, 알쓸신잡이네요.
누구 한 명은 ‘행운은 모르겠고 불운은 방금 생겼다’며, 좋아하는 사람과 약속을 잡고 싶었는데, 상대방이 그날 일정이 있다고 거절당했다네요. 물어본 내가 미안하다. 연애도 행운이죠. 타이밍이 좋아야 하니까. 내가 좋아할 때는 관심도 없다가, 마음 다 뜨고 나니 나를 봐준다거나. 정말로 일정이 계속 안 맞는다거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줄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모든 연애는 천운이라고 생각합니다.
갓 스무 살이 된 제자가 짝사랑하는 친구가 생겼다고 어제 연락이 왔습니다. 근데 타지 사람이라, 방학 중엔 본가에 간다고 3개월 동안 못 본다며 아쉬워했어요. 그치. 장거리는 힘들지. 좋아하는 사람이 같은 지역 사람인 것도 행운이라면 행운이겠네요.
‘행운이 와도 준비가 안 되면 못 먹더라고요.’라고 말씀해주신 분. 어쩌면 흔한 말입니다. 남들이 말했을 때는 그냥 뭐 ‘작은 행운들이야 모르고 넘어가면 모르긴 하지’ 정도였는데. 말투가 과거형이고, 말씀해주신 분이 조금 유명한 게임의 개발자님이셔서. 어쩐지 한 문장만으로 ‘많은 일이 있으셨구나..’를 느꼈습니다. 같은 말을 다른 사람이 했을 뿐인데 왜 받아들여지는 게 달랐을까요. 행운의 형태와 크기는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게 다를 텐데. 남의 행복을 제가 함부로 저울질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네요.
업보
업보라는 단어는 쓰임새가 쓰임새인지라 막연히 안 좋은 거라 생각했는데, 그러게.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고, 그 친절이 생각도 못한 순간에 기적 같은 도움으로 돌아온다면, 그건 행운일까요 업보일까요. 내 손으로 이뤄낸 행운.
달의 첫날에 남에게 행운을 빌어주면 이뤄진다는 '그렇다 카더라'가 있다고 합니다. 타인을 위해 빌어야만 이뤄진다니, 낭만적이지 않나요. 제가 "내 소원 빌면 안 되는 거야?"라고 했다가 "니는 마인드부터 행운 탈락이다."라는 소리 들었습니다. 낭만도 탈락.
오하아사 1등
오늘의 별자리 운세를 오하아사라고 합니다. 그날의 운수와 행운의 아이템을 가볍게 말해줍니다. 저의 오늘의 오하아사 순위는 12개 중에 9등입니다. 오늘 행운은 글러 먹었네요. “너무 무리해서 피곤하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해 주세요.”라고 합니다. 아니. 지금 동네방네 도움 요청 중인 거 어떻게 알았지.. 야채 카레를 먹으라네요. 못 먹었습니다.
연락할 때 바로 나와줄 수 있는 친구가 있는 것도 행운이지 않나요. 라고. 몇 년 전 친구가 오밤중에 전화를 했습니다. 전화란 건 하지도 않는데 진짜 큰일 났나 싶어서 후다닥 받으니, 본인이 술 취해서 길거리에 앉아 있다고, 도저히 못 일어나겠다는 전화였습니다. 마침 아무 일정이 없어서 전화 끊기도 전에 데리러 뛰쳐나갔습니다. 이 가시나가 겁도 없지. 전화할 정신은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나도 일 있고 아무도 못 나갔으면 어쩔 뻔했냐.
작업 중에 그림 위로 내려쬔 따뜻한 햇살. 날씨가 좋은 것도 행운이죠. 몇 달 전부터 여행 계획을 세우고 예약을 하면 그날부터는 기청제를 지내야 합니다. 날씨 좋아라 제발. 얼마 전엔 지인과 미술관에 갔는데, 날씨가 너무 좋았습니다.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고 기분 좋은 바람이 살랑살랑 불었습니다. 사람도 없고 분수가 흐르는, 미술관 앞에 있는 정자에 누워서 눈 감고 조용히 기분 좋은 순간을 즐겼습니다. 옆의 지인은 그대로 기절하심. 좋은 날씨. 물소리와 나무 흔들리는 소리, 바람의 촉감, 그곳에 있었던 것, 그 순간 쉴 수 있었던 시간. 행운입니다.
어떤 분은 본인에게 행운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큰 운인 로또가 아니더라도, 소소한 뽑기나, 가위바위보 같은 것도 이겨본 적이 없다고. 이번 생은 행운에 기대지 말아야겠다 다짐하며 살아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런가. 되게 멋있으시다고 생각했습니다. 성품이나 성격이나 실력도, 그릇이 굉장히 크신 분이구나 라고 느껴졌습니다. 운에 기대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건 멋진 일이구나.
누구는 대학교 입학이 행운이었다길래, "그건 실력이잖아요"라고 했더니. 그림은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다르기도 하고, 자신 있는 주제가 나오는 게 행운이라고. 하긴, 저도 자신 없는 주제가 나오는 순간 의지부터 꺾이는 건 사실이니까요. 주제를 보자마자 ‘이거다!’ 하고 바로 떠오르는 것도 행운일까요. 글을 쓸 때 막막한 게 아니라 하늘에서 지시가 내려오듯 영감이 머리에 '파칭-'하고 내려 꽂히는 것도 행운일까요.
버스 배차. 대구경북 버스 개편된 후로 배차 간격이 늘어난 것 같습니다. 기분 탓인지 진짜인지는 모르겠는데, 하루 종일 기다리는 날이 늘어났습니다. 눈앞에서 놓치면 세상을 원망하고,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전’이 뜨면 희열을 느끼네요. 비슷한 결로 신호등도 있겠습니다. 꼭 바쁠 때만 신호 다 걸립니다. 바쁠 때 신호를 하나도 안 받고 쭉 달릴 때의 쾌감은 언제쯤 느낄 수 있을지...
누구는 오늘 공짜로 파마를 한 게 행운이고, 누구는 오늘 발을 접지른 게 불운이고, 누구는 안 쓰던 가방에서 만 원이 나온 게 행운이고. 누구는 카카오페이지 천 원 룰렛에 당첨되고 싶다네요. 원하는 게 이렇게 소박해도 되나.
일단 저는, 오늘 하루 일들이 상당히 피곤함의 연속이었어서 불운 쪽에 가까운 것 같네요. 워낙에 느긋한 성격이라 평생 뛸 일이 없는데, 하필 오늘 아침부터 유독 많이 뛰어다녔습니다. 새벽까지도 할 일이 있고, 내일도 아침 일찍 나가야 하는데.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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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약간의 광기 섞인 투고였습니다.
도움을 주신 스무 명 이상의 분들께 압도적인 감사를 드립니다. 돈 주고도 못 구하는(?) 7세부터 70세까지 연령별 성별별 설문 조사(?)입니다. 애초에 초고를 고민할 정신도 시간도 없어서 남들 이야기 수집이라도 해온 겁니다. 다들 글쓰기에 도움이 되셨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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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듯한 일정의 아침에 20매라는 주제를 보고 약간의 현타와 발악과 반항이 섞인... ‘에라이 진짜 얘기하고 온다’였습니다.
요즘 크리스님이 쬐끔 악마처럼 보입니다.
(크리스님 매번 좋은 주제와 영양가 높은 글쓰기 감사합니다! 덕분에 매일매일이 뿌듯하고 즐거워요.)
엇, 괄호를 반대로 적어버렸네..
“악마님 악마님, 제 영혼을 드릴 테니 기가 막힌 글쓰기 실력을 주세요.”
“이미 더러워진 네 영혼은 필요 없으니 매일 글이나 쓰거라.”
일이나 마저 하러 가야지..
(22.5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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