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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전4

‘너는 원래’라는 말이 싫었다. ‘너는 원래 노포 같은 데는 싫어하니까’라든가 ‘얘는 원래 더 고급진 걸 좋아해’라는 대화가 오고 갈 때가 있었다. 분명히 내 얘기를 하고 있는 건 맞긴 한데. 혼자 멍하니 생각했다. 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던가. 아니, 없었던 것 같은데. 얘들은 날 왜 공주처럼 대접해 주는 거지.

태어날 때부터 행운의 범주 안에 존재했다.
딸이 귀한 집안이었고 오빠가 있는 막내였다. 집안 어른들에게도 유달리 예쁨을 받았다. 동네 어른들은 볼 때마다 보조개를 한번씩 찔러보며 귀여워했다. 생일 잔치에서 할아버지의 무릎은 항상 내 차지였다.

가족 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빠와 엄마는 내가 태어나고 난 후부터 일이 집안이 더 잘 풀리기 시작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시내로 나가는 길이면 아빠는 버스에서 서서 가는 한 시간 내내 한 팔로 나를 품에 안고 있었다. 엄마가 곱게 땋아준 머리는 유치원 선생님들을 매일 감탄하게 했다. 오빠도 여동생을 혼자 두고 놀러 나가는 법이 없었다. 오빠의 친구들도 따라온 여동생을 귀찮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가족들이 만들어 준 행운을 먹고 자랐다.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산타 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겐 선물을 안 주신대요.’

울어도 선물을 받았을 테지만 울어야 할 만큼 서러운 일도 없었다. 행운의 테두리 안에서는 예상 밖의 일 따위 일어나지 않았다. 테두리를 벗어날 만큼 미운 짓을 하지도 않았다.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애써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또 혹여나 테두리의 경계에 다가간다 하더라도 어느새 행운의 범주는 필요한 만큼 더 넓어져 있었다. 사랑의 힘이었다.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는 운 좋게도 예의 바르게 자랐다. 예의 바르게 자란 덕에 예쁨을 받는 일도 자연스럽게 지속되었다.

사촌들을 포함해서 오빠는 넷, 언니는 둘이었다. 한 명은 고모의 딸이고, 다른 한 명의 언니는 맏이였기에 나보다 조금은 덜 예쁨을 받았다. 나는 언니들에게도 예쁨을 받았다. 모두가 모인 명절날에는, 내가 방을 옮기면 언니들이 나를 따라왔다. 별다른 깊은 얘기를 나누진 않았으나 언니들이 나를 보는 눈빛은 어른들의 눈빛과 같았기에. 나는 언니들이 나를 예뻐하는구나 하고 ‘이것도 좋다’ 하고 생각했다. 나도 둘 밖에 없는 언니들이 좋았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한 명의 언니가 사라졌다.

새벽부터 집안이 소란스러웠다. 전화로 무거운 내용이 오가는 듯했다. 궁금했으나 물어볼 수 없었다. 방문을 반쯤 열고 분위기를 살폈다. 무언가 부산스러웠으나 처참할 정도로 차분한 분위기였다. 아빠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은......”

아빠는 말을 하려다 입을 잠시 꾹 다물었다. 그리고 뒤이어 낮게 읊조렸다. ‘죽었다는 건데.....’ 하고. 엄마는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라며 아빠의 말을 다급히 막았다. 몇 차례 통화가 더 오간 후 부모님은 급하게 차를 타고 어디론가 나가셨다.

언니가 사라졌다. 고모네 가족들은 경찰의 말에 따라 언니의 신원을 확인해야 했다. 그 상황이 어땠는지 나는 감히 알지 못한다. 늦은 오후가 되어 우리집에 모인 친척들의 얼굴은 잿빛이었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낮고 조용하게 들리는 단어들을 조합해서 상황을 가늠할 뿐이었다.

언니는 하루 전 호텔에 혼자 투숙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날 새벽, 언니는 세상에서 체크아웃했다. 사인은 자살이었다. 장례는 조용히 치루어 졌다. 우리는 각자 손녀를, 조카를, 동생을, 언니를, 그리고 딸을 잃었다. 목 놓아 울기 어려울 정도로 마음이 무거웠다. 현실감이 없었다. 어떤 위로의 말도 오가지 않았고,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눈물을 삼켰다.

언니가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이제 고모에게는 딸이 없어졌다.

여자 조카는 고모를 닮는다고들 많이 말한다. 좋아하는 음식이나 취향과 체형까지, 나는 고모의 많은 점을 빼닮았다. 이따금 고모 본인조차도 ‘너는 나를 왜 이렇게 닮은 것이냐’며 혀를 내두르곤 했다.
고모를 닮은 나는, 언니가 사라진 후 고모를 대하는 게 어려웠다. 하지 않던 딸 역할을 해야 할 것만 같은 의무감에 시달렸다. 하지 않던 전화를 하며 안부를 물었고 챙기지 않던 생일을 챙겼다. 행운을 독차지하며 자랐던 나는 그 행운을 나눠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으나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고모가 함께한 자리에서는 그녀의 눈을 오랫동안 마주치지 않기 이해 애썼다. 일종의 배려였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오빠가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대신했다. 고모네 집에 생수가 떨어져 갈 때면 알아서 척척 온라인 주문을 해주곤 했다. 그것 또한 행운이었다. 내가 누린 행운을 나눠주는 일을 오빠가 대신했다.

오빠는 내게 모든 것을 양보하곤 했다. 어렸을 때부터 방과 후에 친구들과 놀기보다 나를 안전하게 집에 데려다 주는 일을 택했다. 커서는 맛있는 음식을 나눠 담을 때마다 내 그릇을 더 예쁘게 장식해 주었다. 계절이 지나 옷을 사야 할 때도 자신의 옷을 고르는 대신 내게 더 예쁘고 고운 옷을 골라주기 바빴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은 나 역시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꿈을 꾸었다. 언니가 나왔다. 언니는 내게 편지 세 장을 건네주었다. 무슨 내용인지 기억할 수 없었으나 아주 빼곡히 적혀있었던 것만은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편지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고마움인지 부탁인지 미안함인지 가늠조차 하기 어려웠다.

언니의 부재도 점점 잊혀져 갔다. 누구도 잊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자연스레 익숙해져 갔다. 부재란 그런 것일까. 가끔 생각했다. 언니는 왜 떠났을까. 이런 생각도 가끔 했다. 외로웠을까. 힘들었을까. 말 못할 사정이 있었을까. 그런 생각도 종종 했다.

나는 가족이 만들어준 행운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나 언니의 나이를 넘겼다. 사촌 오빠들이 하나둘 차례로 결혼하기 시작했다. 고모의 아들도 늦은 나이에 결혼을 했다. 이제 그 집에도 ‘딸 같은 며느리’가 생겼다. 그러나 딸을 대신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사이는 결코 엄마와 딸의 사이가 될 수 없었다.
엄마와 나는 고모가 부러움을 느끼지 않도록 티나지 않게 노력했다. 흔한 자랑도 하지 않았고 더 흔한 잔소리도 나누지 않았다. 그런 조심스러움은 몸에 박제되듯 베어갔다.


귀한 딸은 티가 나는 법이었다. 딸은 하고 싶은 일을 모두 해가며 자라났다. 고등학생이 된 딸은 미술이 하고 싶다고 했다. 집안은 아주 부자는 아니었으나 모자라지도 않았다. 부모는 딸이 원하는 대로 미술학원을 보내주었다. 아들은 학원을 안 가도 괜찮다고 했다. 게임을 많이 한다고 가끔 혼나기는 했으나 그것은 어느 집에나 있는 일이었다. 오빠는 여동생에게 거의 모든 것을 양보했다. 딸에게 있어 그것은 아주 오래도록 지속되고 있는 행운이었다.


대학에 들어가자 많은 사람들은 나를 어려워했다. 싫어하는 것도 무서워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듯했다. 그 와중에 고맙게도 다가오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흔히 말하는 베스트 프렌드가 되어주었다. 조금 이상한 것은 그들이 내가 원하는 것과 내가 좋아하는 것을 위주로 따라주었다는 것이다. 취향이 확고한 내가 부러웠던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배려였는지 아직도 알 수 없다.


한 집안의 형제 중 한 명이 잘 되면 나머지 한 명이 잘 안 된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나는 그 말이 언젠가부터 계속 신경쓰였다. 오빠가 힘든 것은 다 나 때문이 아닐까. 내 일이 조금 안 풀리면 오빠의 일은 잘 풀릴까. 이런저런 의문들로 고민이 많은 나날들이 이어졌다. 어떻게 하면 행운을 나눠줄 수 있을까. 애초에 ‘나누어 준다’는 말이 가당키나 한 걸까.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앞으로 길게 봐야 십 년이라는 이야기에 난 다른 어른들께 하던 것처럼 ‘오래 살아야지’ 무슨 말이냐며 너스레를 떨 수 없었다. 그것은 본인을 갈아서 나를 더 길러달라는 말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인류애를 상실할 만한 일과 대놓고 상실감이 있었던 일이 모두 있었다.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도움을 청하고 싶지만 그것도 마땅치 않고 원하지도 않는다. 심신이 너덜너덜한데 소득 없이 바쁘기만 하고 처리 못 한 일들이 쌓여 있다.

사라져 버리고 싶은데 사라질 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아무도 모른다.

(20.6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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