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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전4
(여는 글)
갑자기 내 인생을 쓰자니
머리가 지끈 거린다.
아직 조금밖에 살지 않아 다행이다.
제대로 살아온 것 같지 않아
얼굴이 화끈 거린다.
아직 자기객관화가 덜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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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이고 밝고 귀여운 초고를 써보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다.
원래 내 글로 돌아와서.
그러나 마무리는 희망적으로.
(내용)
나에게는 행운이 없었으면 좋겠다.
행운을 누릴 자격이 없는 사람인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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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도망쳐서 온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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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난 무엇이든 잘하고 싶었다.
열심히 흉내를 냈다.
명절 때, 사촌이 가져온 어려운 퍼즐게임,
나는 은근히 답을 보며 흉내를 냈다.
그러고는 엄마한테 자랑했다.
엄마는 내가 답을 본 것을 알고 계셨다.
그때만큼 부끄러운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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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 나는 대부분의 것을 내 힘으로 했다.
다른 얘기지만, 워낙 독립적인 아이였다.
다른 아이들처럼 부모님이 차를 태워서 학교에 보낸다거나
하지 않았다.
무거운 교과서를 받은 날도
기분이 안 좋았던 날도
걸어서 왔다.
어쩌면 부모님의 양육 방식 덕분에
지금까지 잘 도망쳐온 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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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렇게 재밌는 유년 시절을 보낸 것 같지는 않다.
스마트폰도 늦게 가졌고.
유행도 모르던 아이가 중학생이 됐다.
중학생 때는 친구가 없었다.
아직도 그 아이들 무리에서 나온 한 마디가 기억 난다.
"야, 쟤 치마 길이 봐."
그렇다.
여자애들이 치마와 셔츠를 줄이고, 화장을 할 때.
난 그 어느 것도 하지 않았다.
그들과 같아지면서 까지 친구를 사귀고 싶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그 애들의 유행이 웃겼다.
그 애들이 옹기종기 모여 떠드는 점심시간과 쉬는시간.
나는 열심히 책과 노트로 도망쳤다.
그렇게 뻔뻔하고, 씩씩하게 살아내며
중학교를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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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이 되었다.
중학교 때보다 편해진 분위기였다.
남녀공학이 아니라 그랬을까?
친구들이 생기고, 언니들이 생겼다.
너무 좋은 사람들과 웃고 얘기한다는 게
꿈 같았다.
이렇게 재밌는 일이었다고?
어쩌면 내가 겪은 행운 중 하나 일지도 모른다.
그 사람을 만난다는 것.
'이게 뭐 같냐?
지구다.
바닥에 바늘 하나를 꽂아 놓고, 밀씨를 떨어트려 그 밀씨가 바늘구멍에 들어갈 확률.
그게 얼마나 될 거라고 생각하니?
너희가 대한민국, 서울, 그것도 세연고등학교, 그것도 2학년, 그것도 5반에 와서
우리가 만난 그 확률과 같다.
그게 인연이다.'
이 대사를 참 좋아하는데
내가 이걸 몇 번이고 경험했다.
행운이다.
{이 사실이 더 극적으로 느껴진 건, 어쩌면 중학교 시절 덕분이겠지.
나쁜 걸 뒤로 하고 마주하는 좋은 건 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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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가 해결되나 했더니,
이제는 공부가 말썽이었다.
성적이 참 애매했다.
2등급, 3등급, 4등급이 골고루 섞여서 만들어내는
환장의 하모니.
그마저도 수학이 진짜 안됐다.
영어랑 사회가 그나마 나를 살렸다.
공부라는 다짐은 쉽지 않았고,
나는 지방대에 왔다.
이 결과에는 행운이 덜 따랐다.
인서울 대학 두 곳에 각각 예비 2번, 1번으로 떨어졌으니까.
{이제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내가 준비를 덜 했다.
알게 된 사실이 아니라, 인정한 사실로 정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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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분명히 수학이 제일 힘들었다고 밝혔다.
이에 대비, 내가 선택한 학과는 공학 계열이었다.
도대체 왜 이런 선택을.
하며 지금 후회하고 있지만 소용없다.
나는 많은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만큼 얕게 여러가지를 경험해봤다.
재능이 있는 것은 딱히 보이지 않았지만,
세부 과정과 단계 중간 중간에서 나의 강점은 찾아볼 수 있었다.
다행히도.
수 많은 하고 싶은 것들 중 유독 취미로는 근접이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
공학이었다.
나는 그래서 공학을 선택했다.
하지만 이 선택 이후,
나는 몇 번 도망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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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도망은 창업 사업단이다.
창업이나 경영 관련 사업단에는 공과 계열 학우들은 거의 없다.
그래서 들어갔다.
전공과는 완전히 다른,
시장 조사, 분석, 차별성 등에 대해 고민하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우리만의 아이템을 만들어서 대회에도 나가곤 했다.
꽤나 좋은 성적이 있었고,
PR 실력도 늘고 재밌어졌다.
빠져들었다.
이게 내 길이구나.
전공 과목들에 대해 신경을 점점 안썼고,
이에 대한 대가를 지금 치르고 있다.
{도망 친 곳에 천국은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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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도망이다.
사실 이 이야기의 마지막 도망이기도 하다.
이번에 지원한 채용 연계형 인턴.
전공을 살리지 않는 경영지원 파트로 지원했다.
서류에 붙었고(행운이 따랐나 보다),
면접을 봤다.
이런 질문을 잔뜩 들었다.
"전공과 다른 직무에 지원한 이유가 있나요?"
"이 직무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말해보세요."
"이런 활동을 했다고 했는데 이 직무에 어떻게 활용될 수 있을지 말해보세요."
그러게요.
전공이랑 너무 안맞아서요.
그런데 너무 쌩뚱 맞은 일을 시작하기에는 쌓아온 것이 없어서
그나마 제가 해오던 제조업 기반의 스펙과 창업 관련 스펙으로 지원했어요.
그리고 제가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당연히 면접 때 전공과 맞지 않았다 등의 무성의한 발언은 하지 않았다.
내가 이해하고 있는 직무 내용에 내가 가진 역량이 이렇게나 잘 맞을 것 같아서
그래서 지원했다고, 하고 싶다고 이야기 했다.
아슬아슬하게 면접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두 번째 도망의 결말은 왠지 해피 엔딩일 것만 같다.
막 학기를 앞두고 열심히 발버둥 쳐왔기에,
이번에는 행운을 바라도 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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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망진창으로 나의 일대기를 나열했다.
돌이켜보며 드는 생각은,
'내게 닥친 어려움 앞에서, 온전히 맞서본 적이 있는가?'.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적인 것은,
점차 나로써 살아가는 법을 깨닫고 있다는 것이다.
뭐든지 잘하고 싶지만 맘처럼 되지 않았던 유년 시절,
외로웠던 사춘기 시절,
하고 싶은 것만 많았던 학창 시절을 지났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고 있다.
내가 쓰일 수 있는 곳에 쓰여볼 수 있도록.
이것이 가까운 미래의 목표기도 했다.
'직장 생활 해보기'
직장 생활이 꿈은 아니지만,
평생을 살아감에 있어 한 두번 정도는 경험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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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는 이것을 위한 첫 발걸음을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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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는 글)
도망이었을까?
이제 와서 나는 이 모든 걸 도루에 비유하고 싶다.
야구를 보시는 분도 계실테고 안보시는 분도 계실터이다.
나는 한화이글스의 팬이다.
그중에서도 황영묵 선수를 좋아한다.
대학을 중퇴하고 아마추어 팀에서 뛰던 그 순간에도 프로가 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 결과 2024 드래프트에서 한화의 지명을 받았다.
여느 때처럼 경기를 보다가 그의 플레이에 감동을 받았다.
황영묵의 센스 있는 도루.
그의 도루에서는 간절함이 느껴진다.
그의 모든 플레이에서 간절함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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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더 이상 도망치지 않을거다.
그냥 운명이 이끄는 곳으로,
끌림이 있는 곳으로 도루를 해야겠다.
도루로 3루를 밟고 홈까지 오는 그의 순간처럼.
나도 언젠가 나의 홈을 밟을 날이 올 것이란 믿음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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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루를 하기 위해 투수와 내야수들의 눈치를 살피는 것처럼
나도 기회와의 눈치 싸움을 한다.
항상 준비되어 있는 태세로,
행운을 맞이할 준비를 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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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이 쉽게 찾아오지 않았으면 한다.
더 이상 노력할 힘이 남지 않았을 때,
쉼 없는 눈치 싸움 후에,
그 때 왔으면 좋겠다.
그 때는 꼭 와줬으면 좋겠다.
그동안 나는 열심히 도루를 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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