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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고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인생에 행운이 없다면, 모든 것을 행운으로.
초긍정, 혹은 초낙천.

대학교 4학년 기말고사 시험 당일. 버스에서 졸다가 내릴 곳을 지나쳤습니다. 내릴 곳보다 한 정류장을 더 가버려서, 빠른 걸음으로 올라가면 겨우 시간 안에 도착할까 말까 했습니다. 내릴 때까지 초조했습니다. 늦으면 안 들여보내줄 텐데. 이대로 재수강하나. 졸업해야 하는데 큰일났네.

내리자마자 빠른 걸음과 뜀박질 사이의 속도로 성큼성큼 걸어갔습니다. 체력이 체력인지라 뛰지는 못했네요. 평소에 운동 좀 할걸. 학교까지 반쯤 갔을 때, 갑자기 어떤 냄새가 제 코를 강타했습니다. 엄청나게 맛있는 냄새. 오븐에서 갓 나온 따끈따끈한 빵 냄새. 미친 듯이 포근한 이 냄새가 사람을 막 홀렸습니다.

시계 한 번 보고, 눈 질끈 감고. 그래. 1분이면 살 수 있다. 결국 뒷걸음질 일곱 걸음으로 도착한 빵집. 방금 나온 소보로. 평소에는 줘도 안 먹던 소보로인데. 샀습니다. 꼭 바쁠 때 이러더라. 그래도 맛있는 냄새에 히죽히죽 미소 지으며 다시 시험장으로 출발.

가는 길에 만난 쓰레기장의 고양이. 아침 산책하는 강아지. 햇볕 아래에 있는 참새. 성큼성큼 걸어가는 와중에도 ‘귀여워-’ 하며 시선이 꽂힌 채 지나갔습니다.

헥헥 거리며 시험장엔 1분 차로 도착했고, 시험도 무사히 쳤습니다. 그날 자각했습니다. 와.. 나 진짜 낙천적이구나. 어쩌면 잘못 내린 순간부터 초조하기만 했을 상황일 텐데, 버스를 잘못 내린 덕분에 방금 나온 빵도 사고, 귀여운 친구들도 보고, 사실 기분은 좋았거든요. 어쨌거나 시험도 쳤으니 잘된 거죠. 아마 성격상 지각해서 시험을 못 쳤어도 ‘어쩔 수 없네- 교수님께 사과 메일이라도 보내볼까’ 이러고 남들 시험 치는 동안 햇살 좋은 곳에서 빵이나 먹었을 겁니다.

이미 지나간 일에 후회하지 않고 곱씹지 않습니다. 이미 벌어진 일인데 뭐 어떡해. 어차피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잖아요. 물론 후회할 일을 안 만드는 게 제일 좋지만, 의도 밖으로 만들어진 실수는 놓아줘야죠.

언젠가 봤던 ‘~때문에’가 아닌 ‘~덕분에’가 듣기 좋다는 글. 그 말이 너무 좋았어서 항상 의식하고 있습니다. 겨우 한 글자 차이인데 받아들여지는 건 하늘과 땅 차이인 게 좋더라고요. ‘잘못 내렸기 때문에’가 아니라 ‘잘못 내린 덕분에’입니다.

낙천적이게 되지 못할 정도로 망해본 적이 없는 거 아니냐. 그럴 수도 있습니다. 아직 그렇게 오래 살지 않아서요. 제일 큰 실수는, 스무 살 초부터 첫 사회생활을 해오면서 꼬깃꼬깃 모아온 몇 백만 원을 스무 살 초중반에 전부 잃었습니다. 프랑스 가보는 게 소원인데, 충분히 다녀올 수 있는 금액이었습니다. 사고 친 건 아니고, 사업 비슷한 거 하려다 말아먹고 전부 폐기 처분했습니다. 그럼에도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수업료 비싸네’ 생각했습니다. ‘빚 생긴 것도 아니고, 부모님 돈 빌린 거 아니라 다행이지 뭐’ 생각했습니다. 같은 실수를 두 번 하지 않는 것만으로 배움과 경험이라 생각합니다.

선생님 생활을 오래 해온 건 아니지만, 오십 명 넘는 학생들을 한 명 한 명 케어해봤을 때, 나이와 상관없이 약간의 공통점이 보였습니다. 모두가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요. 열정이 넘치면 금방 포기하더라고요.

피겨 스케이트 선수 김연아 씨의 인터뷰 중
“무슨 생각하면서 스트레칭 하세요?”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

네. 김연아 씨처럼 생각해야 김연아 씨가 될 수 있습니다. 열정에는 반동이 생깁니다. 목표와 욕심이란 게 생기면 불안, 초조, 질투 같은 게 질척하게 따라 엉겨붙습니다. 스트레스를 못 이기고 포기하게 됩니다.

그냥 하는 겁니다. 그냥 사는 겁니다. 열정도 욕심도 없이 살면 편합니다. 노력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노력은 열정을 가진 사람만큼 해야 합니다. 시간도 체력도 전부 똑같이 투자하되 열정만 내려놓는 겁니다. 잘하고 싶어하면 안 됩니다. 그냥 해야 하니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스트레스 없이 가늘고 길게 끝없이 성장합니다. 단시간에 무언가를 바라면 안 됩니다.

욕심이 없으니 기대치가 없습니다. 웬만하면 실망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기쁨만 생깁니다. 결과물이 못 나오면 ‘이번 건 별로네’ 하고 맙니다. 결과물이 잘 나오면 ’오, 이번 거 웬일로 잘 나왔대. 럭키-‘.

어쩌면 자존감이 낮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자존감과는 별개입니다. 제 자존감이 낮더라도 전공 분야에 대해서는 나름의 고집도 있고 약간의 자존심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타인에게 질투하지 않습니다. 당장 비교하고 있는 상대방에 비해 내가 못나다는 걸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객관적으로 못하는 건 아니니까요. 인생 전체를 이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일에 기대치가 낮으니 불운은 적고 행운만 가득합니다.

자주 하고 다니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 이렇게 모임에 좋은 분들만 모인 거, 당연한 거 아닙니다. 지금 건강한 거, 당연한 거 아닙니다. 취미 생활을 할 수 있는 환경, 당연한 거 아닙니다. 카페에 고양이 있는 거, 당연한 거 아니고요. 문 열고 앞서가는 사람이 뒤따라오는 나를 위해 문 살짝 잡아주는 배려조차 당연한 게 아니니 ‘감사합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하다못해 길 가다 참새 보는 것마저 당연하지 않습니다. 큰 것부터 아주아주 사소한 것까지, 당연시 여기면 안 됩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의 기대치는 올라갑니다. ‘이건 당연히 이래야지’. 도대체 당연이 어디에 있나요.

감사 인사. 고맙다는 말. 너무 좋은 말이지 않나요. 미안하다는 말보다 고맙다는 말이 좋습니다. 누구 하나 손해 보는 일 없이 좋기만 합니다. 감사받는 걸 당연시 여길 수는 있어도, 기분 나빠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밑져야 본전이란 얘깁니다. 말하는 데에 돈도 안 듭니다. 1초면 됩니다. 단 1초 만에 누군가를 기분 좋게 할 수 있습니다. 안 할 이유가 없습니다.

행운은 없으면 만들면 됩니다. 둘러보면 널리고 널렸습니다. 당연시 여긴 것뿐입니다. 애초에 남의 작은 배려나 친절을 당연시 여기는 건 실례기도 하고요. 타인의 행동이니 본인이 어찌할 수 있는 노릇도 아닙니다. 마주하는 모든 게 행운인 거지요.

너무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혹시나 싶어 재차 상기시키자면 노력하지 말란 말이 아닙니다. 노력과 발전은 해야 합니다. 아득바득 시간을 쪼개고 체력을 갈아서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기대만 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비관적이고 스트레스 받으며 살아봤자 본인만 손해니까요.
이왕이면 긍정적이게 살자고요.

(16.0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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