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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고

<행운이라는 유효기한>

태어날 때부터 행운의 범주 안에 존재했다.
딸이 귀한 집안이었고 오빠가 있는 막내였다. 집안 어른들에게도 유달리 예쁨을 받았다. 동네 어른들은 볼 때마다 보조개를 한번씩 찔러보며 귀여워했다. 생일 잔치에서 할아버지의 무릎은 항상 내 차지였다.

가족 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빠와 엄마는 내가 태어나고 난 후부터 집안일이 더 잘 풀리기 시작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시내로 나가는 길이면 아빠는 버스에서 서서 가는 한 시간 내내 한 팔로 나를 품에 안고 있었다. 엄마가 곱게 땋아준 머리는 유치원 선생님들을 매일 감탄하게 했다. 오빠도 여동생을 혼자 두고 놀러 나가는 법이 없었다. 오빠의 친구들도 따라온 여동생을 귀찮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가족들이 만들어 준 행운을 먹고 자랐다.

행운의 테두리 안에서는 예상 밖의 일 따위 일어나지 않았다. 테두리를 벗어날 만큼 미운 짓을 하지도 않았다.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애써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또 혹여나 테두리의 경계에 다가간다 하더라도 어느새 행운의 범주는 필요한 만큼 더 넓어져 있었다. 사랑의 힘이었다.

사촌들을 포함해서 오빠는 넷, 언니는 둘이었다. 한 명은 고모의 딸이고, 다른 한 명의 언니는 맏이였기에 나보다 조금은 덜 예쁨을 받았다. 나는 언니들에게도 예쁨을 받았다. 별다른 깊은 얘기를 나누진 않았으나 언니들이 나를 보는 눈빛은 어른들의 눈빛과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가 사라졌다.

새벽부터 집안이 소란스러웠다. 전화로 무거운 내용이 오가는 듯했다. 방문을 반쯤 열고 분위기를 살폈다. 무언가 부산스러웠으나 처참할 정도로 차분한 분위기였다. 아빠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은......”

아빠는 말을 하려다 입을 잠시 꾹 다물었다. 그리고 뒤이어 낮게 읊조렸다. ‘죽었다는 건데.....’ 하고. 엄마는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라며 아빠의 말을 다급히 막았다. 몇 차례 통화가 더 오간 후 부모님은 급하게 차를 타고 어디론가 나가셨다.

고모네 가족들은 경찰의 말에 따라 언니의 신원을 확인해야 했다. 그 상황이 어땠는지 나는 감히 알지 못한다. 늦은 오후가 되어 우리집에 모인 친척들의 얼굴은 잿빛이었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낮고 조용하게 들리는 단어들을 조합해서 상황을 가늠할 뿐이었다.

언니는 하루 전 호텔에 혼자 투숙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날 새벽, 언니는 세상에서 체크아웃했다.

우리는 각자 손녀를, 조카를, 동생을, 언니를, 그리고 딸을 잃었다. 목 놓아 울기 어려울 정도로 마음이 무거웠다. 어떤 위로의 말도 오가지 않았고,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눈물을 삼켰다.

언니가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이제 고모에게는 딸이 없어졌다.

여자 조카는 고모를 닮는다고들 많이 말한다. 좋아하는 음식이나 취향과 체형까지. 이따금 고모 본인조차도 ‘너는 나를 왜 이렇게 닮은 것이냐’며 혀를 내두르곤 했다.

나는, 언니가 사라진 후 고모를 대하는 게 어려웠다. 언니를 대신해 딸 역할을 해야 할 것만 같은 의무감에 시달렸다. 평소엔 하지 않던 전화를 하며 안부를 물었고 챙기지 않던 생일을 알뜰히 챙겼다.

고모가 함께한 자리에서는 그녀의 눈을 오랫동안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애썼다. 누굴 위한 배려인지 알 수 없었으나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오빠가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대신했다. 고모가 홈쇼핑 주문이 어렵다며 전화가 왔을 땐 대신 주문을 해주었고, 고모네 집에 생수가 떨어져 갈 때면 알아서 척척 주문을 넣어주었다. 그것 또한 행운이었다.

오빠는 내게 모든 것을 양보하곤 했다. 어렸을 때부터 방과 후에 친구들과 놀기보다 나를 안전하게 집에 데려다 주는 일을 택했다. 커서는 맛있는 음식을 나눠 담을 때마다 내 그릇을 더 예쁘게 장식해 주었다. 계절이 지나 옷을 사야 할 때도 자신의 옷을 고르는 대신 내게 더 예쁘고 고운 옷을 골라주기 바빴다. 집에서는 그것이 너무도 익숙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은 나 역시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언니의 부재도 점점 잊혀져 갔다. 누구도 잊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자연스레 익숙해져 갔다. 부재란 그런 것일까. 가끔 생각했다.

나는 가족이 만들어준 행운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나 언니의 나이를 넘겼다. 사촌 오빠들이 하나둘 차례로 결혼하기 시작했다. 고모의 아들도 늦은 나이에 결혼을 했다. 이제 그 집에도 ‘딸 같은 며느리’가 생겼다. 그러나 딸을 대신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사이는 결코 엄마와 딸의 사이가 될 수 없었다.

엄마와 나는 고모가 부러움을 느끼지 않도록 티나지 않게 노력했다. 흔한 자랑도 하지 않았고 더 흔한 잔소리도 나누지 않았다. 그런 조심스러움은 몸에 박제되듯 베어갔다.

한 집안의 형제 중 한 명이 잘 되면 나머지 한 명이 잘 안 된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오빠가 힘든 것은 다 나 때문이 아닐까. 내 일이 조금 안 풀리면 오빠의 일은 잘 풀릴까. 어떻게 하면 행운을 나눠줄 수 있을까. 애초에 ‘나누어 준다’는 말이 가당키나 한 걸까.

어느 날 교통사고가 났다.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로 실려갔다. 차를 폐차할 만큼 큰 사고였으나 그마저도 행운이 따랐다. 조금 다쳤지만 골절된 곳 하나 없었다. 병원에서 퇴원하니 일거리가 쌓이다 못해 넘쳐 흘렀다. 너무 고단해서 지속적으로 지쳐갔다.

그때쯤 오빠의 일이 거짓말처럼 잘 풀리기 시작했다. 더 좋은 곳에 취업을 했고 조금 더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어쩐지 나는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느 순간 나는 집안의 걱정거리가 되었다. 부모님은 나의 앞날을 걱정했다. 부모님은, 나를 보호해 주는 자신들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고 물었다.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앞으로 길게 봐야 십 년이라는 이야기에 난 다른 어른들께 하던 것처럼 ‘오래 살아야지’ 무슨 말이냐며 너스레를 떨 수 없었다. 그것은 본인을 갈아서 나를 더 길러달라는 말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행운에 유효기한이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었다.

(15.0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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