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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우물우물. 아는 누구잉감. 음식을 씹으며 말하는 상상을 해본다. 야가 와이라노. 부모님이 대꾸하는 말까지 들은 것만 같다. 어쩌다 밥상머리에서 존재에 대해 물어보면서까지 누군가를 긴장시켜야 하는지, 바짝 집중해서 글을 읽었다.

이 글이 좋은 이유는 유인하기 때문이다.
다음 돌다리로 폴짝 건널 수밖에 없게끔 궁금증을 유발한다. 익숙한 장면을 가져와 상상하게 만든다. 다음 문단에는 다른 장면이 오지만 새롭게 궁금하기에 이질적이지 않다. 과학자 친구의 낯 간지러운 연애편지 이야기를 꺼낸다. 세 문단이나 할애하여 현대인이 지키고 싶어 하는 정체성을 설명한다. 네 번째 문단에 되어서 드디어 제목에 쓰인 '추석'이 등장한다. 이어지는 질문에 이골이 난다. 한때 온라인에서는 잔소리 가격표가 큰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실상 질문을 받으면 떨떠름한 표정으로 '예,예' 얼버무리게 된다. 그래선지 문단을 읽을 때 명절 4D체험이라도 한 듯 생생했다. 다음 제안이 너무나 낯선 것이다. 굳은 표정으로 말을 자르거나, 넉살 좋게 웃어넘기지 않는다. 질문만 이어간다. 당숙이란 무엇인가, 추석이란 무엇인가, 결혼인가 무엇인가. 클라이막스다. 터져 나오는 질문들을 읽으며 이제야 전체 설계가 눈에 들어온다. 처음 질문과 마지막 질문으로 수미상관 구조까지. 더할 나위 없다. 떡밥을 회수하는 스토리라인에 열광하는 시청자가 된 기분이다. 본질을 묻는 말에 받아칠 수 있는 질의자가 있겠나 싶다. 막상 대답은 할 줄 모르는 채 피상적인 질문만 던지는 어른들의 태도를 신사적으로 나무란다. 속이 시원하다.

두 번째 좋은 이유는 웃겨서다.
해학의 민족이라고들 한다. 아픔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며 꽉 막힌 에너지를 방출시켜 준다. 웃기겠다고 함부로 덤비면 안 된다. 왜 아픔인지, 어떻게 아픈지 들여다보고 풀어낼 방법을 골몰해야 한다. 보편타당한 언어로 공감을 자아내고, 얼굴 근육을 이완시키고, 파안대소를 이끌어내기까지. 와중 희화화되지 않도록 적정선도 지켜야 한다. 발화의 순간에서 이 모든 걸 감내하고 시도하는 자는 성공 타율이 높다. 눈치가 빠르고 순발력이 좋아야 한다. 글에서 웃기기란 더 어렵다. 시간은 벌어지지만 제한적이다. 같은 공간에서 표정이나 몸짓을 가미해서 웃길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명절에 철학적인 질문을 이어가라더니, 미쳤냐고 물어보는 앞에서는 '제정신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으라 한다(여기서 터졌다. 진짜 제정신인가). 소크라테스 대리석 흉상이 떠오른다. 이 흉상 지향자는 칼럼 말미에 자신에게도 묻는다. 칼럼이란 무엇인가. 당신들을 은근히 나무라는 자신도 근본에서 벗어나지 않겠다는 겸손한 태도가 해학의 정점이라 생각한다.

[“추석이란 무엇인가” 되물어라]에 관한 비평

(6.7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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