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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라웃
시간도 목적지도 정하지 않았다. 편히 만나 어디론가 훌쩍 떠나자는 약속 뿐이었다. 오후로 넘어가는 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일어난 나는 출발하자는 메시지를 그에게 남겼다. 그가 왔고 난 차에 올랐다.
어디로 갈까.
글쎄....
여기 어때?
여긴 어때?
적당히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
나즈막한 건물이 오밀조밀한 작은 도시가 어떨까.
자연이 가까워야 해.
경주.
경주.
그래 경주가 좋겠다.
관계로부터 거리가 필요할 때 가 있다. 우린 친구의 친구로 시작된 사이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아서 적당하게 편한 그는 오늘 같은 날 만나기 딱 좋은 친구다. 계획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경주가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우리에게는 그저 작은 일탈이 필요했다. 날씨 앱에선 흐릴거라고 예보되어 있었다. 쨍쨍한 날씨가 느닷없었지만 가을이 되고 해가짧아지니까 햇빛을 충분히 즐겨야 한다는 것 같은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경주였다. 어여삐 물든 단풍과 쾌청하게 드높은 하늘이 기다렸다는 듯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우리 저기 저 넓은 데로 달려갈래?
아님 잔디에 누워 책이나 읽을까?
무엇이든 좋았다. 어떤 이유도 필요하지 않았다. 훌쩍 떠날 때마다 챙기는 책과 시집이 손에 들려 있었다. 아무렇게나 흘려보내도 될 시간이 우리 앞에 있었다.
활자를 통해 전해지는 물성을 느끼다 시선을 돌려 산책하는 연인들을 보았다. 까르륵 웃는 학생들이 지나가자 모든 것이 어우러져 완벽한 풍경이 되었다. 그 사이로 적당한 거리에 있던 이방인이 슬며시 울타리를 넘어 스며들어왔다. 희미하지만 붉은 무언가가 내 안에서 피어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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