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정하기
스케치
그녀는 Q-01834이다. 오늘의 업무는 ‘고백을 받고 긍정적인 대답을 하는 여자‘ 역할이다. 472번째 고객이다. 그와의 약속 장소는 종종 가던 카페, 관계는 대학시절 영화 동아리에서 만나 졸업 후 연락이 뜸해졌다가, 9개월 전부터 묘한 기류가 있었던 것으로 설정되었다. 최근 1개월은 서로의 마음을 예상했던 것으로. 이를테면 일기예보에 비가 있으면 우산을 챙기라는 메시지를 남기거나 퇴근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서로를 궁금해하거나 주말에 식사를 하며 일상을 나누거나 하는 식이다.
그녀가 자리에 앉았고, 가벼운 인사를 건네는 동안 그는 이미 긴장해있었다. 그녀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숨을 크게 들이 마셨다. 그 사이 그는 얼음 물을 들이키며 오늘을 위해 수백 번 연습한 말을 목구멍까지 끌어올렸다. '세상에, 완전히 그녀잖아. 완벽해. 이건 실전과 다름없어. 정신 똑바로 차려.' 그는 준비한 말을 토해내듯 뱉었다. 그녀 역시 조금은 놀란 기색이었으나 긍정의 표정과 말, 그가 다음 말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모든 것이 그가 주문한 대로였다. 그는 가까스로 호흡을 조절하며 마지막 고백을 건넸고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제 그녀의 대답만 남았다. '자, 이제 말해. 어서, 어서 대답해. 나를 사랑한다고. 너도 그 말을 기다렸다고!' 그는 몇 초 동안 그가 지불한 금액을 떠올렸다. 이정도의 구현이라면 합당한 지불이었다. 그는 안도와 자신감에 잔뜩 부푼 채 그녀를 바라봤다.
잠깐의 침묵. 모든 것이 순조롭던 그때, 갑자기 그녀가 조금 이상했다. 그녀는 말을 버벅거리고 심지어는 눈알을 좌우로 빠르게 움직이지 시작했다. 곧이어 테이프 늘어지는 소리를 내며 그녀가 축 처졌고 상황은 종료되었다. 남자는 완전히 망친 상황극에 한숨을 쉬었다. 이번엔 믿을만한 회사였다. 후기도 좋았고 실제로 렌트 과정부터 오늘 만남 직전까지 섬세하게 케어 받을 수 있었다. 그냥 넘기려던 주의사항, '배터리 방전 시 기계가 오작동으로 멈출 수 있으므로, 반드시 충전이 가능한 장소에서 경험하십시오.'가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래, 젠장. 또 렌탈 서비스를 신청한 내 탓이지.'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익숙하게 그녀의 목덜미 아래 충전기를 뽑아냈다. 충전선 길이도 콘센트까지 충분하지 않았고 열을 식히려 집어든 물잔도 비어있었다. 그는 충전이 되는대로 마지막 연습을 하고 당장 이 한심한 짓을 그만둬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그녀에게 고백하는 연습을 멈춰야만 했다.
(6.1매)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