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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
차마 수많은 인생의 책갈피를 뺄 수가 없어서, 널 놓을 수 없다. 이건 핑계가 되기에 충분하다. 자그마치 우리가 7년째 만나는 중이다. 요즘같이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7년이면 강산도 변하겠다. 사실 강산은 잘 모르겠고, 너와 난 확실히 변했다. 우린 지금 어딜 가고 있는걸까.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그 속에 사랑이 가득 채워졌는지 모르겠다. 마치 질소 가득한 감자칩같다. 제조 회사에는 과자를 보호하기 위한 명분이라도 있다. 이 사랑 외의 것들은 우리의 사랑을 지키고 있긴 한가. 혹은 해치고 있는걸까.
“쟤 좀 봐, 발레하는 것 같아.” 내가 14살 중학생 2학년이던 2015년, 그때 정확히 너란 존재를 인식했다. 합동 체육 시간에 발레하듯 피구하던 아이. 양 손을 위로 올리고 턴하며 공을 피하던 옆반 남자애 ‘이상하다‘ 그게 너의 첫인상이었다. 1년 뒤 우린 같은 반이 되었다.
네 이름을 인식했다. 학우로만 우리 사이가 정의될 줄 알았다.
3학년 4반 교실에서만 아는 척하던 우리가 학교 밖에서도 만났다. 토요일 저녁마다 만났다. 주말이면 미사 보고 오라고 닦달하는 엄마를 만족시키기 위해 성당 갔다오겠다는 거짓말을 하고 집을 나갔다. 그렇게 바깥을 배회하다 돌아가길 반복하던 중, 넌 나의 성당 땡땡이 짝궁이 되어주었다. 날이 갈수록 토요일이 기다려졌다. 그리고 귀가 시간이 점점 늦어졌다. 성당에서의 1시간은 길었는데 우리가 함께한 시간은 너무 순식간이었다. 결국 꼬리가 점점 길어져 들켜버렸다.
들켰을 때쯤 우리는 하교한 뒤에도 함께 시간을 보냈다. 나랑 하굣길에 핫도그 먹자!
널 좋아한다는 말은 했지만 사랑을 말하진 않았다. ‘15살짜리인 네가 뭘 안다고, 나한테 사랑을 속삭여?’라고 고작 15년 산 내가 그렇게 생각했다. 사랑해라는 말보다 좋아해에서 더 진정성이 느껴졌다. 나이에 맞는 단어가 있단 오만한 생각이었을까. 나의 마음이 사랑에 닿을만큼 무겁지 않았던 걸까. 두려웠던 것 같다. 사랑해라는 말이, 불씨를 활활 태울 산소를 싣고 모닥불로 떠날까봐. 그렇게 내 손아귀에서 내 감정 조종대를 잃을까 무서웠다. 무서움을 뒤로 하고 그 말을 내뱉었을 때,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그렇게 제철을 맞은 우리의 사랑이었다. 풍년이 들면, 벌레가 꼬인다. 사랑이 커질수록 바라는 게 많아졌다. 내가 주는 사랑이 많아질수록 많이 받고 싶어졌다. 서로를 각자의 입맛에 맞추려고 애를 썼다. 연인들은 홍대역 2번 출구에서 많이들 싸운다면서요? 우리는 놀이터를 주 전장으로 삼았다. 그곳은 어린 우리에게 더없이 좋은 논쟁의 무대가 되었다. 수많은 싸움은 우리가 비슷한 사람이 되도록 만들었다. 우리가 비슷한 사람이 되어 가는 건 좋은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너가 나에게 자아를 위탁했는지는 몰랐다. 난 전당포가 아닌걸. 어리둥절했다.
일주일에 한 번 만날 때면 대화는 없었다. 난 힘겨운 기숙사 생활에 지쳐 우느라 바쁘고, 넌 그저 날 안았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이젠 자신으로 살고 싶다고 선언했다. 여태껏 내 삶을 함께 살아왔다고 그만하고 싶다고 말했다. 난 너의 자아가 내 세상을 영유하길 바란 적 없다. 우리의 우주가 넓어지길 바랬는데, 너는 왜 내 세상만 보고 살아온걸까.
날 사랑하냐는 질문엔 모르겠다고 답한다. 사랑이 아직 남아있다면 계속 만나달라는 나의 구질함과 애절함에 모르겠다고 일관한다. 기어코 칼자루를 나에게 쥐어준다. 어쩔 수 없이 난 칼을 휘둘렀다. 그렇게 헤어짐을 고했다. 비겁한 아이에게.
갑작스러운 브레이크는 사고를 낸다. 뒤따라오던 수많은 사랑들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나를 덮친다. 배송지를 잃었다. 정신이 없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 내신 성적이 중요하던 시기, 성적은 고꾸라진다. 전교생 중 이렇게 성적이 하강한 아이는 나뿐이라며, 교무실에 호출당했다.
“선생님, 이쯤되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안 괜찮아져요. 저 할 일이 많은데 손에 안 잡혀요. 언제쯤 괜찮아져요?” 라는 질문에 욕심부리지 말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리고 깍지 낀 두 손을 보여준다.
“두 사람이 만나 사랑을 하게 되면, 깍지 낀 두 손 위에 여러 추억들이 쌓이고 덮여 깍지가 더 이상 깍지가 아니게 돼. 한 손으로 굳어지는거야. 지금 넌 하나로 완전히 합쳐진 두 손을 억지로 떼어낸거지. 그럼 피가 철철 나고, 옆에 살갖들이 너덜거리지 않겠어? 충분히 아파해도 돼.”
마음 놓고 아파하던 중, 너에게 연락이 왔다. 넌 나를 아직 사랑한다고 말했다.
경계선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 칼질 당했다. 그게 너무 아려서, 변한 너를 다시 만났다. 상처가 나면 살이 파이고, 회복될 때는 다시 붙어 새살이 돋아나듯, 우리가 만나 결합되는 것은 치유의 봉합같았다. 바늘로 꼬맨 흔적이 아직 선명하다. 회복하기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걸까.
살갖이 뜯기고, 다시 봉합되는 과정에 떨어져 나온 피, 살갓들은 우리의 사랑 그릇에 고스란히 담겼다. 미움 한 스푼, 정 다섯 스푼, 애틋함 반 스푼....... 뿌옇다. 우리의 사랑엔 불순물이 가득하다.
진수성찬이다. 우리의 사랑 그릇엔 다양한 것들이 차려져있어. 이것들은 다 입으로 들어가 똥이 되려나.
(12.7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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