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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만찬을 즐기며 시계를 거꾸로 돌렸다 서로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우리, 화장을 하고 물담배를 피우고 더러운 길을 걷는 것만으로 바꿀 수 없는 프로그램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의 역할을 사랑했다 단 한 번도 사랑을 나누어 받은 적이 없었으므로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서로의 만찬에 독약을 털어넣을 수 있었다 조그만 상처에도 발작을 일으키는 것만이, 이내 잠들어버리는 것만이 아름답다고 믿는 우리를

우리는 우리의 숫자를 세어나갔다 비커에 담긴 유리 막대처럼 굴절된 시간이 쌓여갔지만 영영 끝나지 않을 모래놀이를 하고 있는 기분이 든 건, 우리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그날의 만찬 이후로부터

소극장에서 대극장으로 이동하는 무리에 섞여 긴 회랑을 지나갔다 주교관에서 저녁 미사의 하프시코드 소리가 희미하게 번지는 시간이었다 잠언을 외우고 예쁜 마리아 처럼 눈을 감았지만

성가대석 위로 은총이 내려앉고 있었다

예배는 훌륭하였다 처음부터 다시 숫자를 세어나갔다
단 한 번 우리를 사랑해준 소녀의 키스를 떠올렸다 여전히 더러운 길 위의 우리도

피와 살을 나누어 먹었고 시계는 더욱 속력을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우리는 하나둘 승천하는 제자들을 보았다 우리의 탄식은 만찬장을 가득 메운 청중들과 함께 서서히 온몸에 퍼져가는 약기운을 느끼며 황홀하게······

박상수, 구원된 사람들의 합창

Amen -!
Wish yoorak merry christmas

(3.6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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