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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고

<거기 있어 주세요>

같이 사는 사람이 며칠째 끙끙댑니다. 평소처럼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지만 심상치 않습니다. 가끔 집중할 때만 떨던 다리를 내도록 발발 흔들어대서 눈 앞이 어지럽습니다. 무릎을 쓰다듬어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네요. 마감일만 되면 매정한 편이라 서운하진 않습니다. 대신 기분은 잘 살펴야 합니다. 여유가 있어야 공놀이나 두어번 해줄 테니까요. 올려다보니 양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미간을 찌푸리고 있습니다. 이번 마감은 뭔진 몰라도 큰 일인가 봅니다. 마음이 복잡할 때는 큰 소리를 내 흉통을 울리면 안정감이 들어요. 웡- 소리를 냈더니 벌떡 일어나 양손으로 저를 방 밖으로 밀어냈습니다. 닫힌 문 앞에서 방 안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다리를 떠는 소리가 더 커졌습니다. 그 소리를 들으니 저도 불안해졌습니다. 마음이 더 흔들리지 않게 가슴을 쫙 펴고 자세를 꼿꼿이 고쳐앉습니다. 꼬리로 바닥을 천천히 훑으니 다시 심장이 천천히 뜁니다. 산책도 공놀이도 내일 해도 되니까, 저 사람은 내일도 저러고 방 안에 있을테니까요. 바닥에 엎드려 눈을 붙입니다.

벌써 며칠이 되었을까요. 저도 오늘은 꼭 산책을 나가야겠습니다. 있다 오후에 산책 끈이라도 물고 흔들어보려구요. 반려인도 오늘은 심경에 변화가 좀 있나봅니다. 온 집 방문을 열어 놓고 돌아다니다 스피커로 노래도 크게 틉니다.

늘 혼자 사랑하고...혼자 이별하고….
나에게 사랑은...상처만을 주었지만...사랑은...웃는 법 또한 알게 했고….
이제 다시...사랑 안 해.....

오랜만에 궁상스러운 노래를 따라 부르니 반갑기도 하고 못봐주겠기도 합니다. 또 헤어진 걸까요. 반려인이 하루 중 대부분 시간을 티비를 보며 지낸 때가 있습니다. 저도 소파에 앉아 턱을 괴었습니다. 화면 속 사람들은 노래를 한답시고 얼굴을 찌푸리며 목청을 보였고 반려인은 눈물을 찍어냈습니다. 저를 끌어안고 목 놓아 운 날은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밤에 온갖 음식 냄새를 풍기며 들어와 노래를 부를 때는 같이 짖었습니다. 덕분에 이웃들에게 미움을 좀 받기도 했어요. 그때는 반려인이 늦게 사춘기를 겪는 줄 알았습니다. 강아지들도 청소년기에는 한창 짖고 나부대거든요. 나중에서야 헤어지고 슬퍼하는 중이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게 벌써 10년도 더 넘었네요.
인간은 이별할 때마다 저리 난리를 펴야하는 걸까요. 어슬렁어슬렁 다가가 손등을 살짝 물었습니다. 반려인이 짜증을 냅니다. 그러더니 푸념을 합니다. 오랜만에 원고 제안을 받았다네요. 꼬리를 흔들었습니다. 원고비를 벌면 수제 간식을 사주곤 하거든요. 이별한 게 아니라 다행스럽기도 하고요. 입을 크게 벌리고 반가워했더니 반려인이 조금 서글퍼진 눈으로 제 얼굴을 쓰다듬습니다. 사랑에 대해 써야 하는데, 세련되게 쓰는 법을 모르겠다네요. 반려인은 피하고 싶은 걸 세련됐다고 말해요. 산책하다 마주한 으리으리한 2층 저택을 보며 세련됐다고 하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하지 못하는 이유가 세련된 말을 못찾기 때문이라고 변명하는 걸 들었거든요. 사랑을 모르겠거나, 말하기 싫거나, 그런가 봅니다.
저는 알아요. 반려인은 저를 사랑합니다. 사랑은 맛있는 걸 챙겨주고 같이 산책하는 거예요. 뭘하지 않아도 바라보는 거기도 하고요. 힘들때 괜히 쓰다듬는 거기도 합니다. 인간의 말로 쓰기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나 봅니다. 혹은 인간끼리 다르게 사랑하는 걸까요? 저는 몸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거나 환경에 적응하기도 하지만, 필요에 의해 배우며 복종하기도 합니다. 제가 보기엔 인간도 그래요. 다만 필요 때문인 걸 숨길 때가 있어요. 그걸 사랑이라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반려인이 만나는 암컷을 여럿 본적이 있어요. 반려인과 상대는 꼭 서로가 필요했어요. 가령 반려인이 마감 때문에 식사를 못 챙기면 방문한 사람이 밥을 사오거나, 방문한 사람이 집 안에서 핸드폰을 잃어버리면 핸드폰을 찾아주는 식으로요. 그들은 가끔 행복해보이고 자주 부딪히더라고요. 두 인간을 보고 있으면 괜히 외로워지다가도 괜히 마음이 따뜻해지기도 했어요.
오던 사람이 오지 않는 건 저도 섭섭해요. 특히 반려인이 글을 쓰기 시작할 때 만났던 사람은 저와 반려인을 많이 사랑했어요. 자주 같이 밥을 먹었거든요. 매번 제가 먹을 간식이나 새로운 장난감을 잊지 않았습니다. 한창 보이지 않다가 오랜만에 얼굴을 봄 날, 반가워서 혀를 길게 늘어뜨리고 꼬리를 흔들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던 인형을 입에 물려주고는 제 귀에 속삭거렸습니다. 
“저 새끼는 됐고, 너랑 못 봐서 아쉽네.”
제 귀와 정수리에 얼굴을 대고 한창 부비대더니 자기 물건을 챙겼습니다. 짧은 머리카락이 털에 와닿던 느낌과 나무 냄새가 기억에 남아요.
반려인이 한참 원고비를 많이 받은 때가 기억나요. 그때부터 사료가 촉촉하고 먹을 만해졌거든요. 머리카락이 구불구불 길고 코가 따갑게 향이 많이 나는 사람이 자주 오기 시작했어요. 원고 작업으로 바쁜 주인이 방에 들어가면 저한테 말을 걸었습니다. 나는 너희 주인이 부러워. 돈이 많나 봐. 너같이 멋진 강아지도 키우고. 나는 돈도 없지만 용기도 없어서 강아지를 못 키워. 저는 말해주고 싶었어요. 저 인간, 돈도 사람도 없어서 무료 급식소에서 밥을 먹었어요. 그 근처에 얼찐거리던 저를 보고 소세지를 하나 나눠주더라고요. 사실 저는 다른 식당 가서 밥 얻어 먹으면 그만이거든요. 몇 개 주지도 않는 소세지 반찬을 나눠주는 걸 보고 저는 알았어요. 같이 살아도 되겠다는 걸요.

(13.3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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