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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고3
<사랑이 아니라고 해봤자>
뜨거운 밤. 내려다 보는 얼굴이 예쁘다. 나는 네가 안경을 벗은 모습을 좋아한다. 네 왼손은 내 오른쪽 어깨를 누른다. 나는 오른손으로 네 팔꿈치를 쓰다듬는다. 몸을 쓰러트리며 네가 말한다.
"내 거야."
순간 몸의 온도가 1도쯤 내려간다. 대답 대신 등을 끌어안는다. 움직이는 날개뼈를 손가락 끝으로 만지작거린다. 단단한 피부. 내 것이 아닌 피부. 남의 것이다.
천장으로 몇 번 숨을 내쉬다가, 곁눈질로 네 귓속을 들여다본다. 귓속에 어둠이 있다. 무슨 말이든 집어삼킬 것 같다. 있잖아.
나, 왜 그 말이 싫지.
몸의 온도가 0.2도쯤 더 내려간다. 집중 좀 하라는 핀잔을 끝으로 사랑은 멈춘다. 끈적하고 차가운 등허리에 뜨거운 이마를 갖다댄다. 치익- 소리가 날 것만 같다. 들리지 않게 입술만 달싹거린다.
'내가 왜 네 거야?'
있잖아, 나. 그 말이 싫어. 네 것이 되는 게 싫어. 사랑은 부담스러워. 어설픈 대답을 요구하는 사랑이 싫어. 소유를 동반하는 사랑이 싫어.
널 끌어안은 손은 차갑고, 네 가슴은 유난히 따뜻하다. 차가운 손 위로 따뜻한 손이 포개진다. 나는 돌아누우려는 네 등을 끈질기게 끌어안는다. 지금 네 눈을 보면 나는 나를 잃어버릴 것 같다.
"왜 사랑한단 말을 안 해?"
내가 싫어하는 또 다른 말. 목이 꽉 막힌다. 밥 먹을 때 이런 얘기는 안 했으면 좋겠다. 안 할 수도 있지. 맨날 사랑한다고 말할 필요는 없잖아. 얼버무린다. 이 대화가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한 번도 안 하잖아."
올 것이 왔구나. 한숨을 삼키면서 숟가락을 놓는다. 이제 밥은 다 먹었다. 그래, 사랑해. 하지만 습관처럼 말하는 사랑이 싫어. 매일 말해야 한다면 난 너무 부담스러워. 버릇처럼 말하면 사랑이 남아있지 않을 것 같아. 사랑해. 사랑한다니까 좋아? 뭐, 딱히 나쁜 의도로 묻는 건 아니야. 진짜 궁금해서 그래. 말이 끊어지지 않도록 급하게 내뱉는다.
"응, 좋아. 나도 사랑해."
담백한 네 대답에 오히려 마음이 무너진다. 나는 네 표정이 굳기를 기대했나보다. 그저 쳐다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가슴이 시리다. 사랑한다니까 좋으냐는 질문은 지독히도 악의적인 질문이었다. 질문에 섞인 악의가 나에게 돌아와 박혔다.
"사랑한다는 말은 듣기도 좋지만, 말하는 사람도 기분 좋은 말인 것 같아.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게..."
마음이 돌처럼 무거워서 새벽까지 잠에 들지 못했다. 도망갈 곳이 없었다. 이젠 내 입에서 나오는 '사랑해'도 진심이 되어야만 했다. 나도 모르게 초조했다.
나도 안다. 사랑이라는 말을 줄곧 피해왔다. 널 좋아하지만, 사랑한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라고. 그러니 너도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라고. 너를 사랑하지 않는 나는, 네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그렇게, 내가 나를 깐다.
일어나자. 함께 누운 침대에서부터 벗어나기로 한다. 몸을 일으킬 때마다 너는 내 팔을 붙잡는다. 팔을 붙잡다가 그 다음에는 허리를 끌어안는다. 숨소리가 잔잔하다. 잠결에도 나를 붙잡는 네 마음은 대체 뭘까. 잠든 사람의 손길이 왜 이다지도 애절할까.
고개를 돌려 잠든 네 얼굴을 가만히 본다. 그냥 깨우기로 한다. 잠든 네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갖다댄다. 눈, 볼, 코, 입에, 쪽. 쪽. 일부러 소리내보지만 살짝 인상을 찌푸릴 뿐 깨지 않는다.
다시 너를 가만히 본다. 속눈썹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려본다. 속눈썹이 팔랑인다. 가슴팍에 가만히 귀를 댄다. 쿵. 쿵. '심장이 참 강하게 뛰는구나' 하고 평소에도 생각했다. 네 심장소리가 방 안 가득차는 듯했다.
이번에는 목에, 가슴에, 허리에, 입을 맞춘다. 네가 손가락을 조금 움직인다. 더듬거리는 손을 깍지껴 잡는다. 끄응-하고 뒤척이며 네가 눈을 뜬다. 너는 눈도 다 못 뜬 채로 나를 끌어다 안는다. 이마에 붙은 머리칼을 넘겨주며 입을 맞춘다. 나도 눈을 감는다.
내게 주어진 너를 사랑하는 시간. 나의 역할은 너를 사랑하는 것. 한 손으로 네 목을 끌어안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쓰다듬는다. 괜히 샴푸 냄새도 한번 맡아본다.
어둡다. 눈을 떠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눈이 무뎌지니 다른 감각은 오히려 예민해진다. 살짝 단 땀냄새, 손끝에 닿는 머리칼, 가슴께에 닿은 살결, 그리고 네 목소리에 침이 고인다.
"...현...아."
네가 내 이름을 부른다. 이름을 한 번 부르고, 성을 붙여 한 번 더 부른다. 너를 사랑하는 무명의 존재가 이름을 얻는다. 싫다. 그저 사랑을 나누는 두 사람 정도로 남고 싶다. 또 다시 이름이 들린다. 싫다. 그저 이름 없는 존재로만 남고 싶다.
네 손길이 머리밑을 간지른다. 나는 네 쇄골 위에 콧잔등을 기대고 상상한다. 손가락 사이로 머리칼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감촉만 남기고 사이사이로 빠져나가버리는 상상을.
커튼 사이로 새벽 빛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잠든 너를 보면서 책상에 앉아 조용히 편지를 써나갔다. 한 문장, 또 한 문장. 이별을 고했다. 이 편지를 끝으로 도망치기를 선택한다. 편지의 마지막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너를 사랑했던 현이가.'
한심했다. 편지의 내용은 몇 번을 봐도 한심했다. 도망치고 싶으면서 좋은 사람으로도 남고 싶어 구구절절 쓴 문장들이 한심하고 또 한심했다.
특히 마지막이 그랬다. '너를 사랑했던'이라니. 사랑한다는 말은 나오지 않으면서 '사랑했던'이라는 말은 이토록 쉽게 나온다.
눈에 잘 보이는 곳에 편지를 놓아두고 옷을 챙겨입는다. 빌려입은 옷가지는 고이 개어 둔다. 챙기지 않은 것이 있는지, 모르고 가져가는 것은 없는지 살핀다.
하루 1회, 식후 2알. 영양제 통에 적힌 글씨가 눈에 띈다. 콘센트에 붙은 스티커, 벽에 붙은 그림 엽서, 메모지에 적힌 낙서까지. 사랑이 손때처럼 묻어있다.
멀찌감치 서서 잠든 네 얼굴을 가만히 본다. 사랑한다는 말은 부담스럽지만,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은 또 거짓말 같아서. 결국 불이 꺼진 현관에 주저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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