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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루다
<아라베스크>
거실 한복판에 놓은 카페트
거기 누워 잠들면
아이는 카페트를 타고 날아
독일에 가는 꿈을 꿨다
그러나
아빠가 독일에서 돌아온 후에
카페트 가장자리에 실오라기 하나가
끊어내려고 당기면 끊어지지 않고
술술술 풀리면서
카페트는 몸을 잃어갔다
아이는 실을 자꾸 당겼다
해맑게, 이내 두렵게
속수무책으로 실을 당겼다
원시적 무늬가 사라진다
아라베스크의 가시덩굴이 시든다
실이 아이의 키만큼 길어졌다 방패연 줄처럼 길어졌다
이내 태평양의 온 물고기를
줄줄이 엮어 말릴 정도로 길어졌다
누이가 돌아왔을 때 지친 아이는 펑펑 울었다
문양은 사라졌고 구멍이 숭숭 뚫렸다
그러나
누이는 냉정하게 다그쳤다
계속 하렴, 멈추면 안 돼
누이는 옆에 앉아서 풀린 실을 갖다 천을 짜기 시작했다
<모스타르>
모스타르라는 도시는 헤르체고비나에 있다
모스타르는 늙은 플라타너스를 닮았다
왜 플라타너스인지는 모르겠으나
한국에서는 플라타너스 나무 무늬가 마치
버즘이 핀 것 같다고 버즘나무라 부른다
모스타르는 다리의 인간이란 뜻이다
모스타르에는 오래된 다리가 있다
오래된 다리를 스타리 모스트라고 부른다
스타리 모스트는 92년까지 건재했으나 그 해 내전이 일어났다
내전 후에 다리는 재건되었다
그 다리 아래엔 세계에서 가장 차가운 강이 있다
빙하물이 흐르고 그것을 네레트바라고 부른다
알프스 빙하 속에 신이 잠들어 있는지 모르겠으나
네레트바는 흐르는 신이란 뜻이다
스타리 모스트에는 네레트바를 떼어놓는 둥근 아치가 있다
누군가는 그 오래된 아치가
무지개 같다고 무지개다리라 부른다
모스타르에는 네레트바를 이어주는 다이버들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다이빙 대회가 있다
대회가 없는 날에도 다이버는 다리 위에서
팁을 받고 강에 입수를 한다
다이빙하다 죽은 다이버가 얼마인지 모르겠으나
강물은 녹색이고 잠에서 깬 물들이 흐른다
나는 플라타너스를 보고 모스타르를 생각했다
플라타너스는 늙은 모스타르를 닮았다
비장의 카드, 기루다 같은 건 내게 없었다.
오늘 주제를 보고 나는 오랜만에 옛날에 썼던 글들을 훑어보았다. 시나 에세이나 소설이나 썼던 것들이 많았다. 글들엔 옛날의 내가 너무 잘 보였다. 그때 그 글들을 쓰고 나서, '나 글에 좀 재능 있는거 같은데?'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 생각만 하면 나는 수치심을 견디기 힘들다. 그때 글들을 쓰고 친구들한테 보여주면서 후기와 피드백을 받았던 기억도, '이딴 글을 써놓고 남들에게 보여주고 있었다니!' 하는 생각만 불러일으킨다. 나는 기루다를 찾지 못하고 가장 최근에 쓴 두 개의 시를 부쳤다. 어쩌면 저 두 시가 기루다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정확히는 가장 최근의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지금 써 놓은 시도 언젠가 열어보면 내 수치심을 가득 채워놓을지 모른다. 그래도 그건 다행이다. 지금 내가 과거의 나보다 낫다는 뜻이니까. 내 글이 별로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수치심은 나에게 원동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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