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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
뾰족하게 반듯한 나무 의자에 흑발을 곱게 땋은 여인이 앉아있다. 바닥에 자락이 길게 끌리는 새빨간 드레스. 자그마한 정사각형 테이블을 앞에 두고, 사람들이 맞은 편에 와서 앉는다.
그동안 여자는 눈을 감고 있다. 자리에 상대가 앉은 것이 확인되면 그녀가 천천히 눈을 뜨고, 서로 눈을 마주친다. 눈빛만을 교환하는 것이 이 자리의 유일한 규칙이다. 어떤 이는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짓고, 누군가는 눈시울을 붉힌다. 이 자리는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까. 여인의 체력이 닫는 데까지?
그 순간 머리가 희끗하고 수염을 기른 남자가 등장한다. 검은색 컨버스 신발이 자유로운 영혼임을 말하는 듯하다. 그가 자리에 앉고, 그녀가 눈을 뜬다. 누가 봐도 그녀가 아는 사람이 등장한 순간이다. 서서히 띠는 미소, 붉어지는 얼굴들. 결국 참지 못하고 두 사람은 손을 꼭 잡는다. 작품이 끝이 난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행위예술
이 작품은 너무 짧아도 싱겁고, 지나치게 지속되어도 징글징글했을 것이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보면서 그녀 또한 영감이라는 것을 받았을까? 처음 몇명 정도는 아주 유심하게 봤을 것이다. ‘이 작품이 잘될까?’, ‘언제쯤 끝날까?’ 그런 생각도 해보았을 것이다. 그러다 나중에는 일하는 기분, 아니면 끝없는 명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시간을 종결하고, 규칙을 깰만큼 그녀의 마음을 동요하게 만드는 사람이 등장한 것은 다행이었다. 그녀와 손을 꼭 잡았던 남자, 그녀와 오랜 시간 작품을 함께 했고 22년만에 재회한 전 연인 울라이다.
울라이는 아마 작품 소식을 듣고 그녀를 마주할지 고민했을 것이다. 전 남친이 이렇게 핫한 행사에 ‘오픈 런’하겠다고 서있는 것도 우습다. 그렇다고 100~200번대면 작품이 이제 출발선에 선 셈인데 멘탈을 흔들어놓는 것도 민폐되는 일이다.
마리나가 ‘지금 여기에 있음’으로써 예술가가 되는 체험을 멋지게 이끌어냈다면, 이렇게 적절한 타이밍에 등장한 그는 인생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벅찬 인연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타인에게 감동을 줄 수 있고, 받을 수도 있는 사람이 되기를 희망하게 됐다. 그리고 그 타이밍은 딱 1,545번째 정도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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