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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

정적만이 감도는 MoMA의 하얀 공간.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의자에 앉아, 낯선 이들과 말없이 시선을 마주하는 퍼포먼스를 진행 중이다.
그녀의 얼굴엔 오랜 수행으로 다져진 듯한 평온함과 단단함이 서려 있다.

그때, 한 남자가 그녀 앞에 앉는다.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온 옛 연인, 울레이다.
마리나의 굳건했던 표정이 처음으로 미세하게 흔들린다.
놀라움, 그리움,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이 그녀의 눈빛을 스친다.
정해진 침묵의 규칙. 그러나 그들 사이엔 이미 수많은 이야기가 오가는 듯하다.

마침내 마리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테이블 위로 손을 내민다.
울레이도 자신의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는다.
두 손이 맞닿는 순간, 시간의 강을 뛰어넘은 애틋함과 깊은 이해가 압축된 공기를 가르며 터져 나온다.
주변의 모든 것이 희미해지고, 오직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듯한 강렬한 순간.
예술과 삶,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며 빚어내는 짧지만 영원 같은 찰나.

이윽고 울레이가 떠나고, 마리나는 다시 침묵 속에 남는다.
그녀의 눈가엔 방금 전의 강렬했던 감정의 파문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한 편의 무성 영화처럼, 깊고 긴 여운을 남기는 재회였다.

(3.0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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