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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카스

<절연 _ 이병률>

어딘가를 향하는 내 눈을 믿지 마오
흘기는 눈이더라도 마음 아파 마오
나는 앞을 보지 못하므로 뒤를 볼 수도 없으니
당신도 전생엔 그러하였으므로
내 눈은 폭포만 보나니

믿고 의지하는 것이 소리이긴 하나
손끝으로 글자를 알기는 하나
점이어서 비참하다는 것

묶지 않은 채로 꿰맨 것이 마음이려니
잘못 얼어 밉게 녹는 것이 마음이리니

눈 감아도 보이고 눈을 감지 않아도 보이는 것은
한 번 보았기 때문
심장에 담았기 때문

눈에 서리가 내려도 시리지 않으며
송곳으로 찔러도 들어가지 않는 것은
볼 걸 다 보아 눈을 어디다 묻었다는 것

지독히 전생을 사랑한 이들이
다음 생에 앞을 못 본다 믿으니
그렇게라도 눈을 씻어야 다음 생은 괜찮아진다 믿나니

많이 오해함으로써 아름다우니

딱하다 안타깝다 마오
한 식경쯤 눈을 뜨고 봐야 삶은 난해하고 그저 진할 뿐
그저 나는 나대로 살 터 당신은 당신대로 살기를
내 눈이 허락하는 반경 내에서 연(緣)은 단지 그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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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겠지만, 오글거리고 과한 갬성 한마디로 인스타에 하트 많이 받는 그런 게 시가 아니잖습니까. 나쁘게 말하면 찌질함, 좋게 말하면 진중함. 누구나 속에 있을 법한 생각을 입말로 꺼내 써주는 이병률 시인을 좋아합니다. 서로 다른 연필 굵기로 가장 많이 밑줄 그어진 시를 골랐습니다.

‘절연’
‘잘못 얼어 밉게 녹는 것이 마음‘
’한 번 보았기 때문‘

앞이 안 보이고, 언제부터 안 보였는지. 저는 운 좋게도 아직까지 앞을 볼 수 있는데요. 적확한 비유는 아닙니다만, 앞을 보는 저도 타인을 잘 오해하고 미워하기 좋아하고요. 좋아하는 마음 한번 결단짓지 못하고 그저 꿰매버린 자국이 숱합니다. 1시간 뒤부터 앞을 못 본다면, 갑자기 눈 비비고 아니 앞을 못 본다면, 시력이 서서히 떨어져 일주일 만에 시력이 없어지면, 당장 어떡할까? 그럼에도 주인공처럼 초연하려면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습니다. 연이은 생각이 이어지게 한 시라 밑줄과 메모도 많았겠습니다.

(4.9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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