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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전2

<부케>

뻔한 결혼식처럼
포수(捕手)의 손에 떨어질 뻔한 부케가
다행 중 불행 신랑의 발등 위에서
센스만점 하늘 높이 날아올랐고
새는 민들레 꽃말처럼 몸을 터트렸다
하객들은 환호했고 신부는 신랑 발에
키스를 했다 포수(砲手)는 떨어진 새를
떨어진 부케를 주우면서 다행히
불행한 일이 생기지 않아 다행이라는
불행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부케>에 대한 아이디어: 불행 중 다행이라는 말, 그 말은 불행적인 사건이 다행적인 사건보다 상대적으로 다수라는 뜻, 다행이 불행보다 낫다는 뜻을 내포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정말 그렇다고 할 수 있는가? 나는 다행스러운 일들이 불행보다 더 많이, 우리 일상 곳곳에 퍼져있다고 생각한다. 무슨 일에 대해 얘기를 들을 때면 나는 자주 ‘다행이다’, ‘그것 참 다행이네’ 하는 대답을 입에 달고 사는데, 그건 습관적인 요인도 있겠지만 우리 주변에 다행스러운 일들이 많이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행이 정말 불행보다 나은가? 다행이란 말은 ‘일어날 뻔한 불행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것보단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는 것이 존재론적 차원에선 더 잘 된 일 아닌가? 심지어 그것이 불행스러운 일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사실 그런 일들을 바라고 있지 않는가? 책을 읽을 때나 영화를 볼 때면, 독자는 주인공이 갈등상황에 빠지기를 바라고 있지 않는가? 물론 현실에서 불행을 바라는 사람은 없겠지만, 불행 없이 살 수 있는 사람도 없다. 그런 삶이 실제로 주어진다면 견딜 수 있겠는가? 불행의 가능성이야말로, 인간이 생각하게 하고 일상 속에서 선택이란 행위를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불행이 의식의 그림자 속에서 세계를 지탱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말이 실례가 될 수 있겠지만, 나는 벌써 오늘 미션에 올라올 글의 내용이 대충 예상이 간다. (내 예상이 틀렸으면 좋겠지만) 어떤 불행(불운)한, 또는 행운적인 일이 있었고, 거기서 이러저러한 생각과 느낌을 받았다는. 그것은 관념적인 면에선 ‘다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불행(불운), 행운이란 말에 대해 갖고 있는 관념적인 이미지를 더욱 강화하고 고착화시킬 것이니까. 불행이란 단어는 더 불행스럽게, 행운이란 단어는 더 행운스럽게. 그러나 나는 그것이 독자에게 어떤 창의성이나 상상력, 질문을 만들어 낼 공간을 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관념적 차원에서 ‘불행’이라 할 수 있는, 고착화된 이미지들을 파괴하는 행위가 그런 공간을 만든다. ‘불운이 위장한 행운’일 수도 있다는 오쇼 라즈니쉬의 말은 ‘불운’이란 단어에 얼마나 많은 상상력을 품게 하는가?

(6.5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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