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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전3

'복'. 삶에서 누리는 좋고 만족할 만한 행운.

태어난 순간부터 행운이었습니다. 엄마 나이 40에 제가 늦둥이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제가 뱃속에 있던 시절, 엄마의 다리 한쪽은 벌레에 물려 두 배가량 부었다고 합니다. 병원에 가서 치료를 하려니 뱃속의 아기에 해가 될 거라 했습니다. 다리를 포기하거나, 아기를 포기하라고 했을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거기서 저희 엄마는 병원에서 도망치는 걸 선택하셨답니다.

도저히 못 버틸 때쯤, 해외에서 돌아오신 실력 있는 의사가 있는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본인의 이름을 걸고 책임지겠다며 치료와 출산을 도와주셨습니다. 덕분에 저도 건강하게 태어나고, 엄마의 다리도 건강해졌습니다.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큰 행운인 거죠. 물론 의사의 실력 덕분이지만, 그 타이밍에 한국, 그것도 지역 병원에 계셨던 것도, 그분을 찾아간 것도, 천운이었죠.

태어나길 복이 좋아서 그런가, 인복이 좋습니다.
형제자매도 이런 형제자매가 없습니다. 제 가족을 아는 사람들은 저를 보면 "다음 생엔 너로 태어나고 싶다"고 합니다. 집 형편은 안 좋았지만, 사이가 좋았습니다. 언니, 오빠는 어려운 형편에도 척척 컸고, 돈을 벌고, 부모님과 함께 저를 같이 키웠습니다. 미성년자 때의 해외여행 4회. 전부 친언니가 과외로 돈을 벌어서 저를 같이 데려갔습니다. 그 당시 언니의 나이는 대학교 학사였는데도요.

대학교를 졸업하고도 계속 곁에 남아 있는 진짜 친구는 한 명이라도 있으면 성공한 삶이라고들 하는데, 그래도 한 손 넘게는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저를 몇 년째 응원해주시고 지지해주시는 몇몇 분의 팬분들도 계십니다. 그분들 덕분에 제가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고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저를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들어주고 계십니다.

큰 인복이 아니더라도, 작은 인복도 좋습니다. 친구와 사람이 없는 겨울 바다를 놀러 갔는데, 전문 사진사 한 분이 저희를 모델로 사진을 찍어주신 적도 있습니다. 티켓을 따로 사야 하는 줄 모르고 개발자님의 강연에 꽃을 사들고 갔을 때엔, 높은 관계자분이 본인 책임을 걸고 들여보내주셨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20만 원 상당의 강연이었습니다. 길을 잃거나, 밖에서 어리둥절하게 곤란한 기색을 띄고 있으면 다가와서 도와주시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술을 마시러 바에 혼자 가면 챙김받기도 합니다. 바텐더 분들이 자꾸 뭔가를 챙겨주시거나, 처음 보는 손님이 술을 사주시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새로 구한 아르바이트의 원장님의 성격이 아주 좋다거나, 새로 등록한 화실의 원장님의 성품이 뛰어나시다거나. 자존감이 낮아질 때쯤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들이 갑자기 연락 와서 자존감을 지켜주기도 합니다.

감사함의 연속입니다. 저의 이 인복들은 제 능력 밖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고마워하는 분들은, 저를 고마워하십니다. 저는 그분들이 있기에 내가 존재하는데, 그분들은 제가 있기에 그분들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나인데, 제가 감사를 받습니다. 운은 계속해서 좋을 수 없기 때문에, 계속 이어지는 운은 더 이상 운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의 행동이 제 인복을 만든 거라고 말씀하시려 한 듯 합니다.

한순간 마주쳤던 인복은 행운이지만, 이어지는 인연들은 제가 그 행운들을 붙잡아두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일까요. 그렇다 한들 처음 만나게 된 순간 자체가 '행운'이지 않나요.

살면서 잘못된 사람도 많이 만났습니다.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에 의해 트라우마가 생겨 10년 넘게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습니다. 길에서 마주친 누군가가 저에게 불쾌한 짓을 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사람을 잘못 만나서 과거는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사람을 잘못 만나서 자존감은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떨어졌습니다. 사람을 잘못 만나서 사람에 대한 불신이 뿌리 깊게 잡혔습니다. 사람을 잘못 만나서 불면증에 정신 상담도 받았습니다. 사람을 잘못 만나서 저체중일 때 7일 만에 5킬로가 빠진 적도 있습니다. 사람을 잘못 만나서. 사람 때문에.

그럼에도 저는 인복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인복이 좋습니다.
좋은 것만 곱씹고 있습니다.
좋은 것만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불운은 지나가지만, 행운은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10.5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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