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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전4

지금 여기에서 집안 재산이나 복권 당첨 같은 운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스스로 얻은 것 없이 불평하는 삶이라니, 그것만큼 무의미한 것도 없으니까.

그럼에도 “너는 참 운이 좋네.”라는 말은 좀처럼 들어보기 힘든 말이었다. 반댓말은 제법 많이 들어봤다.
스스로 자조하듯, 나는 꾸준하게 운이 좋지 못했다.
딱 하나만 더 맞혀줬으면, 단 한 번만 더 성공했으면, 그런 순간들에서 나는 번번이 미끄러졌다.
그 순간들마다 많이 괴로워했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울분에 가득 찼다.
쟤는 왜 내가 원하는 것을 쉽게 가질까, 나는 왜 저 자리에 설 수 없을까.
삶은 끊임없는 시험과 경쟁의 연속이었고, 그 단순한 서바이벌 게임의 반복은 내게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걸 알려줬다. 나의 기준으로 세상이 공평해질 수는 없다. 그것을 깨닫는 데에 많은 시간이 걸렸다.

입시하던 시절의 나는 능력주의에 완전히 빠져있었다. 모든 것은 내 능력으로 얻을 수 있는 대상이었다. 강사가 정리해주는 대로 주워먹는 공부와 주입당한 사고방식, 내 생각이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진로라는–흔히 장래희망이라고 하는–것 조차도 소거법의 결과였다. 내가 떠올려본 많은 상상의 잎들에 외부의 입김이 하나씩 불어왔고, 그것들에 일일이 흔들려서 떨어지는 약한 나무였다. 그렇게 내 깜냥에 맞다고 판단되는 진로를 정했다. 그리고 그때는 별로 나보다 간절해 보이지도 않는데 생각한대로 시도해볼 수 있는 사람들이 그저 부러웠다. “헬조선”과 “꼬우면 북한 가라”는 말로 기억되는 폭력적인 시대였다.

이렇게 흘러들어간 대학생활도 순탄하지는 않았다. 학과 공부가 맞지 않아서 겉돌던 내게 다른 시험에 합격한 선배가 그 시험을 권했다. 솔직히 그전까지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던 분야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대화가 지금까지 흘러오게된 큰 기점이었다. 학과에서 많이 준비하는 루트 보다 구미가 당겼고 (아주 광의의 범위에서) 내가 추구하는 삶과도 닮아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발들인 곳이 하필 또 레드 오션이었다. 노력 많이 했네, 이쯤하면 되겠지 싶은 해에 한 문제 차이로 떨어졌다. 다시 반복되는 생각. 찍은 거 중에 딱 한 개만 맞아주지... 그 다음 해는 여러모로 더 어려운 상황이라 마지막 기회였다. 정말 간절해서 엄마가 사준 부적도 가지고 다녔다. 그런 영적인 물건을 믿거나 가까이 한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부적 쓴 사람 말로는 내가 시험 본 해의 운이 마지막이라고 했고, 거짓말 같이 그 해에 결판이 났다. 합격이었다.

그해는 그 전 보다도 더 필사적이었고, 뭐라도 부정을 부를 수 있는 일은 피하려고 했다. 쓰고 보니 주술적인 뉘앙스마저 보이지만, 사실은 생활 태도가 달라졌다는 게 요점이다. 아마 평생에 걸쳐 큰 업적을 이뤄내서 ‘노력과 행운의 주인공’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그런 마음 가짐을 인생 내내 지고 사는 사람들이 아닐까? 루틴과 징크스 관리에 철저한 여러 사람들이 떠오른다. 나는 짧은 얼마간 그런 마음을 잠시 체험해봤지만 그 사람들은 수십년의 시간을 그렇게 보냈을 것이다.

그렇게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나의 행운 지수는 리셋된 것 같았다. 꾸준하게 회사 내에서 유명한 폭탄들과 함께 했으며, 내가 맡은 업무에서는 꼭 전부터 오랫동안 미뤄왔던 문제가 터졌다. 첫 발령부터 좋은 사람들과 같이 일하며 많이 배우고 사람도 챙기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시험은 그냥 공부하면서 그날 좀더 재수가 좋기를 바라면 되는건데 이제부터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거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본부에 자리가 난다는 소식을 들었다. 누울 자리도 안보고 함부로 뛰어들었다간 혼자 바보되는 일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비선호 부서라서 생기는 자리였다. 그런데 본부 사정과 조직 상황에 어두웠던 나에게는 입사 때부터 고려했던 선호 부서였다. 언젠가 일해보고 싶은 곳이었다. 그렇게 옮긴 뒤로도 힘든 일은 이어졌다. 하지만 내가 해보고싶었던 일이라 그런지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여전히 이상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지만,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게 됐다.

그 후로도 대외적인 '비선호 부서'를 전전했다. 그래도 나름 취향껏 선택한 곳이었다. 나는 이 조직과는 좀 다른 인간임을 알게 됐다. 어찌 보면 그건 운이 아닐까? 남들이 탐내는 것과 방향이 다르다는 건 경쟁 사회에서 좀 내려놓을 수 있다는 거니까. 그런 생각이 들때 쯤 승진을 했고, 이번에도 원하는 부서로 지원을 했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부서로 발령이 났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비선호 부서라서 당연히 갈줄 알았다. 후에 알고보니 다른 사람들도 속으로 "왜 저런데 지원하지? 당연히 가겠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생각지도 않았으며, 가장 긴장도가 높고 보수적인 부서로 발령이 났다. 이제 이 조직의 흐름에 대해 좀 안다고 생각했는데 새로운 기점이 찾아왔다. 어쨌든 여기에서의 시간들이 향후 몇 년간 미래를 결정하게 되겠지. 그러다 또 좋은 기회가 찾아오기를 바라면서.

앞으로 남은 직장생활 동안 운이 얼마나 많이 작용할지 가늠할 수도 없다. 이 안에서 나는 스트레스에 아주 취약한 인간이 되었다가, 지금은 또 새롭게 주어지는 과제에 녹아드는 생활을 하고 있다. 직장생활 보다는 조금 더 길게 갈 인생에서도 똑같이 생각하려고 한다.

한강이 보이는 반포 래미안 원베일리 한 채 가지는 건 나와 너무 상관없는 방향성 같다. 그런 물건이 목적이 되는 삶은 지금까지 쌓아온 경로와도 달라서 오래 지속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층간소음에 휘말리지 않는 집을 구해 지금처럼 많이 읽고, 가끔씩 술도 하면서 보내는 삶을 보낼 수 있는게 행운을 누리고 싶다. 그걸 위해서 하나하나 단계를 밟아나가고 있다. 가끔씩 주어지는 행운들을 바라면서.

(14.1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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