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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전4
난 뭐든 동그란 것을 좋아한다. 세모와 네모보단 동그라미가 좋다.
모나고 뾰족한 것보다는 둥그런 원이 좋다. 그래서 내 이름을 사랑하는 것 같다. 주위를 보면, 손녀 만나기를 기대하고 있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예쁘게 이름을 지어줬다는 사람들이 많다. 뭐 요즘은 작명소에서 한자 획과 수를 따져 좋은 이름을 받아오기도 하지만. 내 이름은 우리 아빠가 지어주셨다. 하나밖에 없는 딸 이름을 꼭 자기가 짓고 싶다며 사주와 작명에 관련된 책을 모아 혼자 공부하셨다.
그렇게 해서 나온 내 이름. 아빠 성을 가졌고, 동그라미가 두 개 들어가는 내 이름. 나중에 들은 거지만, 엄마가 사주 선생님께 내 이름 누가 지었냐며 참 좋은 이름이라고 하셨다고 전해주셨다. 의미 있고, 소중한 내 이름. 누군가 저 멀리서 나를 부를 때 입술이 동그랗게 모아지는 게 좋다. 소리만 들어도 기분 좋다.
행운.
행운도 그렇다. 두 음절뿐인 짧은 단어지만 동그라미는 세 개나 들어있다. 지금 보니 내 이름의 초성과 똑같다. 이 세상에 나오고 보니 이름에 히읗과 이응을 갖고 있었고, 지금까지도 유독 히읗이 들어간 단어를 보면 괜히 기분이 좋다. 행운, 행운은 나에게 이름과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연필로 종이에 ‘행운’을 쓸 때도 괜스레 광대가 봉긋 솟아오르고, 길을 걸어가다 ‘행운’을 보게 되면 몸이 가벼워진다. 매일 한 번 이상은 듣는 내 이름. 그 이름이 불릴 때마다 행운이 찾아온다고 믿고 싶다.
보통 운이 좋은 날, 행운이 나에게로 찾아왔다고 한다면 어떤 걸 보고 말하는 걸까. 로또에 당첨된 걸 행운이라고들 많이 표현한다. 내가 평생 벌어도 가질 수 없는 돈을 종이에 적힌 번호 6개로 얻을 수 있다는 거니까. 결국 내가 갖고 싶거나, 되고 싶고, 하고 싶은 게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나 시간에 벌어지면 운이 좋다고 한다.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댓글 이벤트에 당첨돼서 콘서트 표를 받거나, 떨어진 줄 알았던 대학이 후보가 많이 빠져 합격하게 됐거나. 결국 내가 쉽게 갖지 못하는 것을 원하고 바라며, 그게 별다른 노력 없이 덜컥 되는 행운을 바라고 산다.
큰 행운을 바라며 사람들은 행운을 거창하게 생각한다. 오늘 하루 속에서 행운을 찾으라고 하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데 말인데. 행운이란 게 그렇다. 단어만 봐도 긍정적이고, 좋은 일이고, 밝다. 아무리 예쁘고 밝은 조명이라도 계속 눈앞에 두면 시야가 어두워지는 것처럼, 그것만을 바라고 살면 불행한 삶이 된다. 좋은 일이 일어나도 더 큰 행운을 바라고 더 큰 이득을 바라면 작은 행운도 잡을 수 없다. 그냥 열심히 살면… 아니 그냥 살자. 살다 보면 녹색의 반짝이는 행운이라는 친구가 날아와 머리 위에 앉는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대가 없이 주어지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등가교환의 법칙은 곳곳에 숨어져 있는 법. 내가 유일하게 쉴 수 있는 평일인 월요일. 카페에서 여유로움을 느끼고 싶다면 커피값을 내야 한다. 그래야 예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자리에 앉을 수 있다. 내가 나를 위해 쓰는 시간에도 체력이 들어가고, 돈이 들어간다.
행운도 똑같다. 행운이 나에게 왔을 때는 분명 내가 살아온 시간 속에서 한 부분의 기억을 골라 쏙 빼간다. 그게 행복한 기억이든, 힘들었던 기억이든 나에게 줄 행운과 내 경험을 등가교환한다. 대가 없이 주어지는 게 없다면, 대가 없이 주어지는 행운도 없다. 내 기억을 가져가 행운을 내려준다면 행운이 가져간 내 기억이 의미 없는 것보다는 예쁜 게 좋으니까. 그냥 열심히 살자.
그러고 보니 내 생에 행운이란 게 있었나?
누구나 한 번쯤은 연예인을 가슴 속에 품고 산다. 난 유난히도 어릴 때부터 티비와 컴퓨터를 좋아했었다. 그래서 그런 걸까. 지금 동년배 친구들보다 더 많은 연예계 세상을 알고 있다. 소위 말하는 케이팝 교수님이랄까. 학창 시절부터 케이팝 사랑은 대단했고, 또 대단했다. 처음으로 좋아한 연예인이 아마도 가수 비 (정지훈) 였던 것 같은데. 드라마 풀하우스를 꼬박꼬박 챙겨봤고, 다음으로 좋아한 연예인은 배우 공유 (공지철). 예상할 수 있다시피 이번에는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 덕분이다.
대한민국에 컴퓨터 음악이 등장하고, 아이돌 산업이 나타나면서 자연스럽게 케이팝 아이돌을 좋아하게 됐다. 학창 시절 내내 아이돌을 좋아하다 성인이 된 후부터는 밴드 음악에 빠졌다. 언제쯤 끝날지 모르는 덕질 생활에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당신은 ‘덕계못’ 이라는 말을 아는가. 덕후는 계를 못 탄다는 문장을 줄여 덕계못이라고 한다. 나는 길거리를 지나가며 한 번도 내 최애, 내 연예인을 눈으로 본 적 없는데 별로 관심도 없는 내 친구가 내 최애를 봤다거나 하는 그런 이야기. 팬이란 그런 것이다. 아무리 방구석에서 좋아한들 미친 듯이 좋아하는 나는 못 보고, 관심 없는 내 친구가 계를 타는 것.
4년 전 겨울, 살다 보니 나에게도 이런 일이 생기는구나했던 날이었다.
난 뒤늦게 전공을 다른 길로 가게 되었고, 막 밴드에 눈을 뜬 시기였다. 덕질할 대상이 생기면 오직 그 대상에게 내 시간과 체력을 쏟는다. 유튜브에 밴드를 검색하고, 각종 SNS에서 떠오르는 사진이나 영상을 보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끝낸다. 그날은 내가 좋아하는 밴드가 저녁 여덟 시에 깜짝 팟캐스트를 한다며 공지를 올렸다. 팟캐스트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은 딱히 없었지만, 접속 인원에는 제한을 뒀다. 팬이 몇 명인데 겨우 오백 명만 접속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오세요, 오세요. 값싼 물품 많이 팝니다 홍보는 많이 했는데, 막상 가보면 구멍가게인 느낌이랄까. 이런 이벤트성 팬미팅을 할 거면 미리 얘기하고, 인원을 좀 늘려주면 좋으련만. 그래도 뭐 어때. 일단 들어가면 되는 거 아냐?
항상 바빠 죽겠을 때 하고 싶은 건 넘쳐난다. 해야 할 일이 많았지만, 팬심 하나로 속전속결 저녁 여덟 시가 되기 전에 다 마무리했다. 이제 내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은 우리 오빠들을 보기 위해 모든 준비를 끝내는 것. 그날 진행했던 팟캐스트는 게스트가 매번 바뀌는 거라 다른 연예인이 했던 팟캐스트를 통해 미리 알고 있었다. 온라인에서 하는 작은 팬미팅과 같은 것이라, 연예인과 직접 얘기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었다. 그 밴드 멤버가 접속한 팬들 가운데 특정 한 명을 선택해서 말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
즉, 내가 우리 오빠랑 일대일로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엄청나고 대단한 공간이라는 건데… 덕계못의 법칙은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어딜 가나 존재하는 법. 마음을 비우자, 운이 좋으면 직접 대화할 수 있겠지만 그런 일은 쉽게 오지 않으니까.
쉽게 오지 않으니까. 그래, 쉽게 오지 않아. 그렇긴 한데 말이지. 기대하는 건 괜찮잖아? 내 안에 항상 잔잔하게 깔린 관종이라는 친구는 그때 갑자기 문을 두드리고 나타났다. 오백 명이면 승산 있다. 오천 명, 오만 명도 아니고 오백 명 중 하나잖아? 아무리 내 이름을 사랑한다고 한들, 세 글자의 딱딱한 한글은 전혀 오빠들의 눈에 띄지 못할 것 같았다. 닉네임을 바꿨다.
[ 루시 제 5의 멤버 ]
왜 5의 멤버냐고? 그 밴드 인원이 4명이거든요. 원래 사람은 활자보다 사진에 눈이 갈 수밖에 없다. 닉네임 바꾸는 걸로는 오빠의 눈에 거슬리게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활자보다는 사진? 그럼 프로필 사진을 바꿔야겠구나. 나의 악기 베군(베이스 기타)을 들고 연습하고 있는 사진으로 바꿨다. 그들은 밴드이기에 자연스럽게 악기를 보면 궁금증이 생길 거라는 판단하에 내린 행동이었다.
베이스 기타를 들고 있는 루시 제 5의 멤버 솔직히 내가 봐도 이건 승산이 있었다. 뭔가 기운이 좋았다. 아니, 확실히 뭔가 하나는 될 것 같았다. 행운은 원래 쉽게 오지 않으니 내가 확률을 더 높이는 수밖에. 한술 더 떠서 혹시나 내 베이스 연주를 들려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베이스 기타와 앰프까지미 미리 준비했다. 두 큰술 더 떠서 루시 노래 중 내가 제일 아끼는 베이스 라인을 연습했다. 준비는 다 됐어.
저녁 여덟 시가 되자마자 빠르게 입장을 클릭했고, 선착순 오백 명에 들었다. 이거였다. 케이팝 덕후 짬이 여기서 나오는구나. 소수로 모여 대화하는 공간에 들어갔다는 것만으로도 행운의 신은 나의 뜻을 조금 들어준 거 아닐까? 사실 들어간 이후부터는 운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이름도 사진도 특별하게 바꾼 나를 알아봐 주는 건 이제 그들의 몫이 됐기에. 그때였다.
“오, 제가 임의로 고르는 거지만. 이분 좀 특이한데요? 일단 아이디가 심상치 않습니다.”
“베이스를 치고 있네요?”
? 뭐지 이거. 나 꿈인가.
진짜다. 이거 실전이다. 행운의 신이여.
보컬 멤버가 눈에 띈다며 나를 골랐고, 직접 대화할 수 있는 마이크를 켜줬다. 정말 떨리면 염소 목소리가 나온다고 하는데 염소는 무슨, 성대에 진동기가 달려있는 줄 알았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하니 어떤 걸 담당하냐는 물음에 베이스 기타로 대답했다. 우웅-. 하는 소리를 들려주니 아니나 다를까, 월척이다. 베이스 소리가 난다며 마구 웃고, 들뜬 목소리가 이어폰에 꽉 찼다. 2초의 베이스 소리로 우리 오빠들을 이렇게 웃길 수 있다고? 난 진짜 다 가진 여자야. 웃음이 조금 걷어진 후, 바로 준비한 베이스 라인을 쳤다.
“제자로 모시고 싶은데 레슨 받으러 오지 않을래요?”
(대충 이런 뉘앙스였다. 저 떨렸다고요. 기억 안 난다고요…)
그 이후부터는 팬과 연예인이 할 수 있는 간단한 대화를 5분간 했고 마이크가 꺼지고 난 후 나는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BPM 250으로 뛰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내 생에 이런 날도 오는구나, 덕계못 깰 수 있는 거구나. 처음으로 인생에 큰 운을 맛보았고 짧은 5분이 극강의 단맛으로 느껴졌다. 난 김칫국 마시며 악기와 앰프를 준비했고, 들려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 그 곡의 라인을 연습했다.
운은 그냥 오지 않는다. 분명 그날의 행운은 내 인생의 한 부분을 가져갔을 것이다. 눈을 처음 본 날 행복하게 지었던 미소거나, 첫 수시에 떨어져서 하루 종일 흘렸던 눈물이거나. 운처럼 보이지만 예감과 준비가 만든 기회였다. 그날 나는 운을 감지했고, 준비했으며 붙잡았다. 운은 먼저 두드리지 않는다. 나는 항상 운이라는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날 내 머리에 떨어진 행운과 가까워지려고 손잡이를 있는 힘껏 돌렸을 뿐이다.
행운은 살다 보니 온다. 그러니까, 그냥 살자.
행운이 기분 좋게 가져갈 수 있는 인생의 재미있는 동그란 에피소드를 많이 만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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