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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전4

나의 기도는 항상 끝내 이루어졌다. 그러니 나에게 항상 행운이 도사리고 있었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펜의 잉크가 닳으면 곤란하다는 듯이 아끼고 아껴내어 기도를 보내는 편이다. 어린 시절, 할머니를 따라 교회에 처음 갔다. 그 교회는 하천을 낀 농촌 마을답지 않게 큰 교회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 교회를 들락거렸다. 목사의 연설이 한몫했다. 어린 나의 눈에도 꽤 설득적이고 호소력 있는 내용과 목소리였다. 열정적인 목소리는 주일 오후마다 공간에 울려 퍼졌고, 어린이반에서 나는 그것을 엿들을 수 있었다. 내용은 대충 신의 사랑과 희생, 용서 그러한 것들이었다. 신이 보이지 않는데, 신이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열정적으로 기도를 펼치는 어른들이 나는 신기했다. 어른들은 어찌 보이지 않는 것을 모든 것을 바치고 감내할 수 있을 듯 구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런 것들을 관찰하고 감시하는 것도 나름 교회의 지루함을 타파할 수 있는 수단이었던 것 같다.

그 중 가장 이해 가지 않은 것은 ‘헌금’과 ‘회개‘라는 것이었다. 분명 종교의 목적은 사랑이며, 그 수단 또한 순수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무엇인가 거부감이 들었다. 가난한 자와 부자인 자를 인지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도 했었다. 어린 마음에 그런 것들과 설교의 내용에 왠지 모를 이질감을 느꼈던 것 같다. 어렴풋이 교회가 돌아가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설교가 끝나고 마지막에 십자가 박힌 주머니를 돌리는 것을 보면, 이상하게도 머리가 아팠다. 십자가에 돈을 내지 않으면 마치 이상한 사람이 되어 소외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회개는 죄스런 생활 태도에서 탈피하여 하나님께 귀의하는 일을 말한다고 한다. 나는 이 말씀 때문에 중학교 1학년이 되던 날, 교회를 가지 않기 시작했다. 원론적으로는 좋은 말씀이지만, 그 당시에는 그것들을 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조금 질리기 시작했다. 분명 교회 사람들은 나를 정말 예뻐해 주시고 기도 해주셨지만, 회개를 인간의 면죄부로 여기는 느낌에 나는 순간적으로 진절머리를 느꼈다. 진정한 반성이 아닌 도피로 보였다. 계속 그곳에 있으면, 왠지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황금 주말에 15분 동안 걸어 아침부터 그곳에 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그 후로는 나는 기도를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아주 작은 기도도 하지 않고 존재하는지도 모를 신과 멀어져 나의 선택과 의지로 살겠다고, 다짐했다.

그때부터 나는 행운과 멀어져 중고등 시절을 보냈다. 모든 것이 나의 선택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정해진 것, 운명은 없다 믿었다. 외부의 불행이나 행운의 사건이 있을 때마다 나는 불행을 처리하기 위해 바삐 손을 놀렸다. 행운을 쳐다볼 여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분야와 상관없이 여러 상을 받아도 그것에 대한 기쁨과 감사함은 그다지도 없었다. 행동에 대한 결과, 하나의 현상일 뿐,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작은 군단위에서 받은 상들에 기뻐하는 건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생각도 한몫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상들을 받는 건 당연한 일처럼 느껴졌다. 나는 점점 슬픔도 기쁨도 느낄 수 없는 단단한 골룸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는 안다. 골룸의 딱딱한 심장을 얻어 아무것도 느끼지 않기 위한 발버둥이었다는 것을. 빙하에 둥둥 떠있는 얼음처럼. 나는 햇빛에 녹아 심해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그렇게라도 살아남으려고 애썼다. 불행이 일어나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불행을 받아들이는 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마음을 막아내어 보이지 않는 투명하고 단단한 막으로 나를 보호했다. 그때의 나에게는 행운이란 손가락 한 마디의 거리에 있었으나 그럼에도 절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불행에 자발적으로 매립 되어있는 단출한 골렘 하나에게는 행운을 볼 눈 따위는 달려 있지 않았다.

용기있는 자가 행운을 볼 수 있다. 정말 맞는 말이다. 나는 아주 능숙한 도피의 기술을 가진 아이였다. 과거도 나의 뒷목을 움켜쥐고 있었지만, 나의 두 발을 묶은 것은 미래였다. 걱정과 두려움. 무한한 상상과 변수 속에서 나는 떨고 있었다. 빙하가 떠는 것은 정말 어울리지 않는 일임에도, 빙하의 차가운 표면을 지나 그 중심에서 나는 인내심이 다한 낙엽이 흔들리듯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날씨가 청아하게 바람이 불어오는 등굣길에는 아침부터 내가 예측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날까 두려웠고. 태풍이 마을을 덮쳐 홍수가 났을 때 등교하는 날에는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온 것처럼 낯설지 않았다. 불행에 익숙해지는 순간, 모든 것들이 허무로 보인다. 맑은 하늘과 웃음, 성취 같은 행운도 허무가 되고, 불행 또한 허무가 된다. 죽음의 관점에서는 모든 것이 허무이지만, 삶의 관점에서는 모든 것들이 행운인 것을 그때의 난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미 지나간 것들은 멀리서 바라보아서 그런가. 흐릿해진 기억들에서 어느 것이 사실인지 구분조차 어렵다. 어른들이 말하는

여기까지....

(12.2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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