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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전4

<할매>

마요네즈에 싹이 폈다.
자세히 말하면 감자 사라다 마요네즈에 곰팡이가 폈다.
더 자세히 말하면 지난 주 금요일에 할머니가 가져가라고 한 감자 사라다가 상했다.

ep1
외동인 은빈이 집에는 늘 할머니가 계셨다. 나도 집에 가봤자 할머니 뿐이니 햄스터 있는 은빈이 집에 곧 잘 놀러갔다. 은빈이네 냉장고에는 맛있는 음식이 많았다. 치킨 너겟, 딸기 우유, 냉동 피자, 메론. 주황 플라스틱 바게쓰에 우유 데워먹겠다고 가스레인지에 올려두고는 집 나간 햄스터 찾느라 플라스틱이 녹아내리는 줄도 몰랐다. 은빈이 할머니한테 들킬까봐 은빈이랑 나는 걸레로 액체를 다 닦고, 녹아내려버린 껌정 바게쓰와 무거워진 걸레를 우리집 쓰레기통에 버렸다.

며칠 있다 방학식날 또 은빈이 집에 가서 저녁까지 놀았다. 집 가면 늘 나물 반찬에 계란 후라이일 게 뻔한 할매 밥상이 싫어 해가 져도 나는 곧 잘 은빈이랑 놀았다. 그날 은빈이 할머니가 삼겹살을 구우시려길래 ‘아싸, 먹고 가야지’ 했다. 나랑 노는 게 좋았던 은빈이는 은빈이 할머니가 나더러 할머니가 기다리실테니 집에 돌아가라하면 곧바로 ‘싫어. 자고 가‘라고 해줬다.

삼겹살 한 판이 구워졌는데 은빈이 할머니는 삼겹살을 이상하게 자르셨다. 살코기와 비계가 고루 있게 안 자르시고 살코기와 비계를 가르듯 자르셨다. 그 살코기를 은빈이 밥그릇 위에 얹으셨다. 비계들은 키친타올 위에 쌓이고. ’주황 바게쓰 사건을 은빈이가 이실직고해서 할머니가 화나셨나?‘ ’눈이 안 좋으셔서 저리 자르시나?‘ 나는 비계를 소금, 쌈장, 참기름에 번갈아 찍어가며 먹긴 다 먹었다. 두 판째에 은빈이 아빠가 오셔서 다행히 고루 자르신 덕에 온전한 삼겹살 두어점 먹었다. 은빈이 아빠는 나를 불쌍하게 생각했는지 아니면 정말 삼겹살에 진심이었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은빈이가 우리 할매집에서 밥 먹을 때 우리 할매는 안 그랬다. 삼겹살은 못 구워줄지언정 미역국에 소고기는 나보다 은빈이한테 더 줬다. 손님이라 더 주는 게 맞다고 했다. 제일 빨간 사과를 골라 깎아줬다. 집에 갈 때는 꼭 밥솥에 넣어둔 두유 2개를 손에 쥐어줬다. 너무 뜨거우면 검정 비닐에 담아서. 심지어 할매는 슈퍼에서 공짜로 준 새 검정 비닐을 집에 오면 씻어서 보관해두는 분이다.

ep2
사람 6명이 누우면 발 디딜 틈 없을 작은 방. 엄마아빠가 늦게 들어온다는 날이면 나는 할매집에서 할매랑 잤다. 할매 발은 내 머리 쪽, 내 발은 할매 머리 쪽으로 해서. 왜냐면 할매는 기관지염 때문에 아주 독하게 기침을 하는지라 나한테 옮길까 싶어 그렇게 잤다.(그때는 몰랐다. 아쉽게도 중학생이 되고 왜 그렇게 기침하냐고 기여코 짜증 내고서야 알게 된 사실이다.) 내일 초등학교 입학식인데 잠이 안 온다. 9시 뉴스 끝나가는데도. “할매 잠이 안 와” 그때는 커피 마실 나이가 아니었어서 카페인 때문은 확실히 아닌데.

“우유 물래.” “응”

그 밤에 할매는 슈퍼에서 서울우유 한 통을 사왔다. 큰 냄비에 우유 한 대접 부어서 살짝 끓였다. 그걸 또 한참 식혀 컵에 담아 방에 가져다줬다. 읏 뜨거. 뜨겁다가 이내 미지근해졌다. 맨날 미지근하다고 주는데 믿고 마시면 너무 뜨겁다. 양치 싫어하는 걸 아는 할매는 양치하지 말고 뿌글뿌글만 하고 자도 된다 했다. 아싸. 보리차로 입만 헹궜다. 그러고는 전기장판 3단 온기에 곯아떨어졌다.

ep3
할아버지 통화는 늘 이런 식이다.
”예, 할아버지“
”바쁘나?“
”괜찮아요. 말씀하세요 할부지. 왜요~?“
”어디고?”
“당연히 회사지요. 왜요”
“몇시 퇴근이고?”
“6시쯤요. 왜요 할아버지!”
“아니. 시간 있으면 집에 참외 가가라꼬. 할매가 가가란다.”
“예. 알겠어요 할아버지. 오늘 못 가면 주말에 가지러 갈게요.”
“그래. 바쁘면 할 수 없고.”

바쁨을 느긋하게 걱정하는 그런. 용건을 처음부터 말하는 법이 없다.

당연히 뭐 시간 뺏을까 미안해서, 조금이라도 목소리 들으시려고, 한번 집에 들러라는 말을 참외로 대신하시려. 다 안다. 캘린더에 적는다. 이번 주 토요일/할매 참외. 식사 시간에 가면 무조건 밥 먹고 가라 할 게 뻔하기 때문에 늘 어중간한 시간에 가버릇한다. 예컨데 3시나 8시쯤. 참외만 갖고 올 생각으로 밤에 갔다. 마침 밥 많이 해놨다며 거의 밥솥 한 통을 싸줬다 할매는. 마침 수육을 했다며, 마침 마늘을 까놨다며, 할아버지 밭에서 난 되도않는 감자가 너무 많아서 할 수밖에 없던 감자 사라다, 촌에 동락이가 오늘 왔는데 두유를 사갖고 왔다며. 예상은 했는데 늘 한 짐 갖고 온다. 시간 타이밍은 잘 맞추는데 할매 맘은 알 수가 없다. ‘아, 오늘 장날이었네’

참외는 젤 좋아하는 과일이라 반갑다. 근데 사라다는 골치 아프다. 어째 다 먹어내나. 점심 도시락으로 회사에 싸가서 나눠 먹어야 하나. 그러기엔 맛 없는데. 이러다 며칠 지난다. 할매 마음은 냉장고에 아직 남아있다.

불쌍한 감자 사라다.

(12.0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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