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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고

운이 눈처럼 녹네

쓰던 이야기를 엎자. 나는 자칭 이야기 업자. 팔 이야기야 많지. 세상에서 가장 운 좋은 남자, 그 남자의 사촌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이번 기회에는 내 이야기를 하자. 내용이나 구조적으로 하자 많더라도 하자. 한라산에 올라간 이야기를 하자. 왜 이 이야기를 하냐면, 올해 일월에 있던 일이라서. 일월은 한 해의 시작이니까. 한 해의 시작부터 운이 좋았다고 여겼으니까. 또 눈과 관련된 이야기니까. 눈이 좋으니까. 보는 눈, 시력은 나빠도 내리는 눈, 그 눈을 좋아하니까. 눈은 운과 발음이 비슷하기도 하다. 신 앞에서 운을 눈으로 잘못 발음하더라도 몇 번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까. 나도 비슷한 실수를 한단다, 하고.
그날 우리가 등산해서 올라갈 수 있는 곳의 최대치는 한라산 정상이 아니라 대피소였다. 아침부터 일행과 함께 부지런하게 등산 준비를 했다. 정상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다들 크게 하지 않았다. 등산 당일에 눈이 많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예보는 있었으나 그 전날에 이미 정상으로 가는 길이 통제가 된 상황이었다. 눈이 많이 내리면 등산객들의 안전을 위해 정상까지 가는 길을 막아두는 일은 자주 있었다. 눈 오는 날 한라산 정상은 삼대가 덕을 쌓아야 오를 수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두 눈으로 눈 가득 쌓인 한라산을 봤을 때는 삼대까지는 과장이라고 믿고 싶었다. 삼대까지는 아니고 나만 이번 생에 덕을 더 쌓으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올해 덕을 더 쌓고 내년에 또 와야지. 그래서 꼭 눈 쌓인 한라산의 정상을 꼭 봐야지. 그러니 삼대가 쌓아야 할 덕은 과장이어야 했다. 한라산은 정말로 황홀한 풍경을 자랑했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는 곳을 제외하면 흰 눈이 모든 걸 뒤덮고 있었다. 흰 눈 아래 모든 색이 파묻혀 있었다. 물에 퍼진 잉크처럼 허공에 번진 앙상한 나뭇가지도 물이 고여 있는 움푹 파진 웅덩이도 공평하게 희게 지워져 있었다. 길을 잃으면 영영 헤맬 듯했다. 대피소까지 절반 정도 남았을 때부터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앞사람을 따라가면서도 뒷사람이 잘 따라오는지 돌아봤다.
눈에 발이 푹 빠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쌓은 덕은 운으로 치환된다. 조금 더 가 보자면 내 조상이 쌓고 남은 덕이 내 운이 되다. 부가 대물림되듯 운도 대물림되지 않을까. 단지, 사람들은 그게 눈에 안 보여서 부는 대물림하는데 혈안이고 운은 눈에 안 보이니까 덕을 쌓는데 점점 사람들이 둔감해지는 게 아닐까. 덕이 눈에 보인다면 좋겠다. 그럼, 지금보다 덕을 쌓는 사람들이 많겠지. 그렇게 쌓은 덕을 원하는 때에 운으로 치환할 수 있다면. 근데, 그걸 운이라고 부를 수 있나. 또 다른 부가 아닌가. 조상으로 받은 운이 많으면 많을수록 덕을 더 쌓기 쉬울 테니까. 그러니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각자에게 주어진 운이 다르다면, 그걸 운이라고 부르는 건 어렵다. 사전에는 이런 내 생각의 연쇄를 차단하기 위함인지 비교적 명확하게 운의 정의를 명시해 두었다.

운: 이미 정하여져 있어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천운(天運)과 기수(氣數).

사전 정의를 따르자면 나쁜 사람이나 좋은 사람이나 타고난 운이 다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이미 정하여져 있다니. 해석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에서 운은 쓰면 쓸수록 소모되는 부와는 성질이 다른 것 같다. 그럼 덕을 쌓아도 소모해도 본인이 가지고 있는 운이 그대로라면 덕은 왜 쌓아야 하는가. 눈 쌓인 한라산의 정상을 보는 일이 덕과 관련이 없다면 덕을 왜 쌓아야 하는가. 운의 사전적 정의가 운의 실체를 전부 말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다니. 어쩐지 치사하다.
일전에 운과 관련하여 친구과 이런 얘기를 나눴다. 억까도 이런 억까가 없다고. 친구는 워홀을 갔다 왔던 친구였다. 워홀은 자발적으로 갔지만, 한국으로 돌아오는 건 자발이 아니었다. 친구는 모종의 이유로 그 나라에서 추방되다시피 하여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스무 살 때부터 친구의 사정을 어느 정도의 거리에서 지켜본 나로서는 그 말에 공감하면서도 왜 이 친구한테 이런 억까가 일어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내가 봤을 때는 크게 좋은 일을 하면서 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남한테 피해를 주면서 사는 친구는 아니었다. 구분하자면 살아가면서 덕을 쌓는 쪽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덕을 잃는 쪽도 아니었다. 자기 몫의 일은 충분히 하는 친구다. 이제 다음에 이 친구를 만나면 내가 내린 운에 대한 나름의 생각들을 전해줘야겠다. 친구야, 넌 억까를 당한 게 아니다. 넌 그저 가진 운이 남보다 적을 뿐이다. 이런, 전혀 위로되지 않을 것 같다.
대피소에 도착해서는 따뜻한 즉석식품을 먹었다. 얼어붙은 몸이 녹으면서 몸이 노곤해졌지만, 대피소에서 오래 있을 수는 없었다. 해가 지기 전에 하산해야 했다. 대피소에서 나와 본격적으로 하산하기 전 일행들은 돌아가면서 정상으로 가는 길목에서 사진을 찍었다. 정상까지는 가지 못해서, 오히려 다음에 다시 한라산에 올 명분이 생겼다는 말을 나눴다. 그렇지. 여기까지 오는데도 운이 좋았다. 딱 아쉬움이 남을 만큼.
지금은 그 산에 있던 눈이 전부 녹아 물이 되었을 것이다. 대부분은 땅으로 스며들었을 것이고 일부는 구름으로 변했으리라. 물은 자신의 운에 대해서 크게 고민하지 않거나, 할 수 없을 것이다. 오직 인간만이 자신에게 주어진 운을 고민하면서 살겠지. 나는 왜 이렇게 운이 없나, 운 좋다고 생각되는 일이 있어도 괜히 불안해지고 그러겠지. 그런 사람들이 나 말고 또 있다는 생각이 들면 어쩐지 안심이 된다. 다들 운을 얻기 위해, 운을 잃을까 전전긍긍하며 살고 있겠지만, 그와 별개로 운은 우리의 기쁨도 슬픔에도 그다지 관심을 주지 않는 듯하다.
그러니 역으로 운이 눈처럼 녹더라도 우리는 그저 우리 할 일을 하면 되지 않을까. 기쁠 때 기쁘고 슬플 때 슬프고 운 없을 때 운 없다고 한탄하고 운 좋을 때는 운 좋다고 즐거워하면 우리에겐 남은 운이 알아서 할 것이다. 우린 운이 알아서 하고 남은 것들이나 남을 것들을 잘 여며도 좋겠다. 그러다 불쑥 덕이라도 쌓아야겠다 싶으면 그때 덕을 쌓자. 혹시 모르지. 언젠가 눈이 가득 쌓인 한라산 어디에서 우리가 만날지도.

(15.2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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