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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행운을 빌어요. 그들에겐 불운일지라도

(최종본)

우연과 필연

1.
"나는 운명을 믿지 않아."

모니터 속의 그녀는 내게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눈을 뗄 수 없는 아름다운 미소였다. 오늘따라 유난히도 그리운 모습이다.

"오! 저분이 늘 말하던 운명의 상대인가요?"

거꾸로 된 세렌(seren)의 얼굴이 위에서 불쑥 나타났다. 나는 영상의 재생을 멈추고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그녀를 살짝 밀쳤다. 그녀는 우주선 안을 둥실 떠다니다 벽에 설치된 손잡이를 잡고 몸을 가누었다. 그녀는 이번 화성 탐사에 함께하게 된 유럽계 미국인으로, 미국인같이 쾌활하고 유럽인처럼 자유로우며 한국인처럼 말한다. 어쩌면 요즘 애들이 쓰는 신조어는 나보다 더 잘 알지도 모르겠다.

"얼마 남았지?"
"20분 뒤면 다시 통신이 될겁니다"

창 밖을 보니 화성의 붉은 땅이 보인다. 화성은 위성 두 개를 가지고 있다. 데이모스와 포보스가 그것인데, 데이모스는 화성으로 부터 대략 23,000km정도, 포보스는 9,4000km의 거리에 위치해 있다. 이들의 운명은 극명하게 갈리는데, 데이모스는 점점 화성의 중력권에서 탈출하여 언젠가는 검은 우주로 날아갈 운명이다. 반대로 포보스는 화성의 중력에 의해 부서지거나 추락할 예정이다. 4명의 선원이 탑승한 우리 우주선은 앞서 말한 위성들의 운명을 거부하고 둘 사이의 절묘한 위치에서 공전하고 있다.

우린 이미 탐사 로버와 착륙선의 랜딩 준비를 끝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몇 분 뒤면 화성 뒤에 숨어있던 지구가 나타날 것이고, 통신이 재개되면 우리는 결과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세렌은 다른 동료들과 사소한 잡담을 나누다 다시 나에게로 날아왔다.

"그래서... 지구는 멸망했을까요?"

2.
나는 운명을 믿는 사람이다. 인지할 수 없는 어떤 흐름이 나를 이끌고 있다고 느낀다. 그 흐름이 약하다면 거슬러 갈 수 있겠으나, 만약 몸을 가누지 못 할 정도로 거세다면 결국 그 흐름에 휩쓸려 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개척자이다. 운명을 거스를 순 없으나 방향은 조절 할 수 있다. 흐름 자체를 바꾸려고 노력을 하면 되는거니까. 얕게나마 수로를 만들어두면 물이 그곳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나는 우연히 학회장에서 그녀를 보았고 강한 이끌림을 느꼈다. 하지만 나와 그녀 사이에는 접점이 없었고 앞으로 만날 마주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운명을 조율하기로 했다.
나는 우연을 가장하고 길에서 만나기 위해 부단히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동네에서 내가 사는 곳까지는 1시간이 넘는 거리였다. 하지만 그 정도는 걸림돌 축에도 끼지 못했다.
수차례 스쳐가는 만남 속에서 그녀가 내 얼굴과 이름을 기억했을 때, 그리고 그녀가 나의 안부를 궁금해 하기 시작했을 때 그것은 나의 노력이 만들어낸 필연이라 생각했었다.

나중에 이 이야기를 해주자 그녀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렇게 노력을 한 사람이 너라서 정말 다행이야."

그렇게 그녀는 나의 세계로 들어왔고 그녀 덕분에 나는 화성 탐사 프로젝트에 대해 알게 되었다.

우주항공 기술을 선도하던 미국, 중국, 일본, 인도에서는 수차례 화성으로 무인 우주선을 보내 테라포밍 설비들을 설치했다. 뒤늦게 우주 시대에 편승한 우리 나라는 이 틈을 비집고 들어가지 못했고, 언론에서는 한국 우주연구원에 대해 혹평을 쏟아 놓을 때였다.
유럽에서는 드디어 화성으로의 유인 우주발사 계획을 실행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발사 과정에 문제가 생겨 우주선은 우주 미아로 떠돌게 되었다. 우주선에 타고 있던 수많은 우주 비행사들의 유족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 시위를 했고 계획되었던 화성 탐사 계획이 모두 보류되었다. 우리 나라는 이틈을 노려 아주 소규모의 인원으로 세계 최초의 화성 유인탐사를 계획한 것이었다. 이 계획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사람이 그녀였다.

그녀는 궤도를 계산하는 사람이었다. 실력은 아주 뛰어났고, 가끔은 계산을 통해 미래를 예언하는 것 처럼 보일 정도였다.

지구에서 화성까지의 평균 거리는 2억2500만km이다. 지구와 화성도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기 때문에 서로의 거리는 계속 바뀌는데, 서로가 가장 가까울 때의 거리는 약 5,600만km이며 가장 멀 때는 약 4억1000만km이다. 우주선의 속도나 연료등을 계산한다면 화성까지 가는 데는 4~5개월이 걸린다. 그러니 화성까지 가는 최단거리를 계산하기 위해서는 지구와 화성의 공전, 우주선의 궤도를 계산하는 것이 필수다. 그녀는 이 계산에서 중심 역할을 했다.

나는 신체가 건강했으며 공학 부문에 석사 학위가 있었고 좋은 가정 환경 덕에 모나지 않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가 내 곁에 있었다. 화성 탐사 계획을 미리 전해 들은 나는 그녀의 조언 하에 착실하게 준비를 했다. 내가 화성 탐사에 대한 준비를 모두 끝냈을 때, 때마침 그때가 26개월 주기로 찾아오는 화성 탐사선 발사가 최대 효율을 내는 시기였다. 그리고 탐사 대원을 모집하는 공고가 올라왔다.

이것은 운명이었다. 모든 것이 이 순간을 위해 준비되어온 여정이었던것 같다. 나는 당연히 지원했고 필연적으로 합격했다.

5개월전,
나는 화성 탐사선에 올랐다. 나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한껏 고양된 나를 걱정하던 그녀는 조심하라는 말과 함께 여행의 운을 빌어주었다. 우주선은 항해를 시작했다.

3.
2개월전,
그날도 우리들은 신변잡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수 개월을 좁은 우주선 안에서 함께 지내온 동료들은 총 4명이었다. 생명과학자 한 명, 의료인 한 명, 그리고 공학자인 나까지 한국인이었고, 우주선의 운행과 유지 보수를 담당하는 세렌 혼자 외국인이었다.

세렌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유럽에서 유명한 엔지니어로, 이름만 대면 모든 유럽인들이 알만한 사람이라 했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아버지의 이름을 말했었지만 발음이 어려워 한번에 알아듣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분명 들어본 이름이었다. 아니, 사실은 굉장히 유명한 이름이었다. 세렌의 아버지는 우리 나라가 화성 탐사선을 보낼 수 있게 된 그 유인 우주선 사고 당시 타고 있던 승무원이었다.

수 년 전, 아파트 한 단지 크기의 우주선이 발사된 적이 있었다. 화성 기지를 건설하여 그 안에서 실내 생활을 하며 외부 환경이 테라포밍 되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목적이었다. 모든 인류의 꿈을 안고 우주선이 발사되던 때 카르만 라인을 넘어서던 우주선에서 신호가 끊어졌다.
우주선 고장에 관해서는 수많은 이야기와 비난이 오고 갔다다. 선상 반란이 일어났다는 허황된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미국 측에서 제공한 전자 장비가 인치 야드법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문제를 일으켰다는 추측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미국은 미터법을 따르지 않아 우주선을 폭파시킨 전례가 있었으므로 이를 해명하느라 진땀을 뺐다. 우주선 고장의 정확한 이유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쨌든 제어장치가 고장난 것은 확실했고 우주선은 계속해서 지구 근방을 커다란 타원 궤도를 그리며 돌고 있을 것 이라 추측되고 있었다. 그 안의 선원들은 음식 고갈로 다들 굶어 죽었을 것이라는 슬픈 사실 만은 추측이 아니라 확정적인 사실이었다.
세린의 아버지는 그 우주선에 타고 있었으며 지구로 마지막 신호를 보낸 인물이었다. 그 신호에는 우주선 제어 장치의 고장 사실과 함께 세렌에게 보내는 미안하다는 말이 담겨있었다.

그날도 일과에 따라 맛없는 튜브형 음식을 짜먹고 운동기구에 갇혀 근력운동을 한 뒤 개인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녀와 어두운 밤하늘에 대해 이야기를 화상 메세지로 주고 받았다. 나는 답신을 녹화하고 전송 버튼을 눌렀고, 나의 모습과 말을 담은 전파는 빛의 속도로 지구로 날아갔다. 하지만 이미 너무 멀어진 터라 11분 뒤에나 지구에 도착할 것이다. 내가 보내는 데 11분, 그녀가 보내는데 11분. 대화 한번에 적어도 22분이 소요되는 것이 우주인의 일상적인 통신감각이다. 그녀의 메시지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유리창 밖 어두운 우주를 바라봤다. 그녀가 보고 있는 어두운 밤하늘과 내가 보고 있는 검은 우주는 아마 같은 것일테지. 그때 무언가가 빠르게 날아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내가 발견한 것은 지름이 족히 20km는 될만한 소행성이었다. 멀리서 보이는 그것은 마치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나는 꼬박 하루를 투자하여 그 소행성의 궤적을 확인했고, 데이터를 그녀에게 보냈다. 소행성을 피하기 위해 경로를 수정할 경우 예기치 못한 연료 소모로 인해 화성 궤도에 안착하지 못할 지도 몰랐다.

데이터 분석 결과는 몇 시간 만에 나왔다. 아마 그녀도 필사적으로 계산을 했으리라. 우선 좋은 소식은 소행성과 우주선의 충돌 가능성이 0%에 수렴한다는 것이다.

"와.. 운 좋게도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가네요!"

특유의 쾌활한 목소리로 세렌이 말했다.

그런데 과연 이게 운이 좋은걸까? 진짜 운이 좋다면 소행성이 혹시나 부딪힐까 걱정하지도 않는 상황, 그러니까 이런 일 자체가 발생 하지 않는 것이 운 좋은거 아닐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의 고리를 싹둑 자르며 그녀의 담담한 목소리가 재생되었다.

"소행성은 지구와 충돌 할 거야"

4.
어떤 행성에 소행성이 떨어지는 것은 흔한 일이다. 우주 어딘가에서 지금도 일어나고 있으며, 과거의 지구에도 자주 일어났던 일이다. 그 일이 지금 다시 일어날 뿐이고 현세의 인류가 운 나쁘게도 그걸 겪을 뿐.

다행히도 인류는 이런 불운을 예상했고 이미 대비책을 논의한 상태였다.

  1. DART(Double Asteroid Redirection Test, 이중 소행성 궤도 변경 시험): 말 그대로 소행성을 표적으로 로켓을 다트처럼 던져버리겠다는 과학자들의 작명 센스를 엿볼 수 있는 원시적인 방법이다. 2022년에 이미 디모르포스라는 위성에 로켓을 충돌시켜 궤도를 바꾸는 시도를 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2. 핵폭탄: 헐리웃 영화에서 볼 법한 일을 현실적으로도 고려했었다. 원자폭탄을 실은 발사체를 보내 소행성에서 폭발시켜 그 반발력으로 궤도를 바꾸는 시도에 관한 진지한 논의가 이미 이루어졌었다.

  3. 레이져: 고출력의 레이져를 소행성쪽으로 쏘는 것이다. 우주공간에서는 레이져가 에너지를 잃지 않고 멀리까지 나아갈 수 있으므로, 빗방울이 돌을 뚫듯 긴 시간동안 소행성에 에너지를 투사해 궤도를 바꾸는 방법.

이 세 가지가 그나마 가장 현실성이 있는 것으로 채택 되었다.

나는 한껏 도취되었다. 이 드넓은 우주에서 우주선을 타고 가다 소행성을 마주칠 확률이 얼마나 될까? 게다가 그것이 지구로 향하고 있다니. 내가 이 소행성과 마주친 것은 운명이다. 인류의 존폐를 결정하는 역사적 사건의 페이지에 내 이름이 첫머리에 등장하는 것이다. 나는 이 거대한 흐름이 어디를 향할지 고민해보았다. 지구를 구하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을 텐데. 그럼 사건의 마지막 페이지에도 내 이름이 등장할 것이다.

나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소행성을 쳐다보며 대책을 세웠다. 아니, 우주에는 밤낮이 없으니 뭐라 해야할까...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여하튼 나는 소행성에 천착했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무한한 우주 속 이 작은 우주선 안에서 내가 뭘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내 앞길을 개척해온 사람이다. 수많은 도전과 역경을 모두 헤치고 전 인류를 대표하여 화성으로 가는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나의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소행성은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지구로 날아갈 것이다. 내가 타고 있는 우주선은 내 심경은 아랑곳 않고 임무 수행을 위해 화성으로 갈 것이다.

좌절감에 휩싸인 나날들이 지나가고 소행성은 나의 시야를 벗어났다.

지구와 소행성 충돌까지 2개월 남았다.

지구에서는 혼란과 절망과 희망과 불안이 넘실 댔다. 인류의 멸망에서 우주선의 4인은 제외되어있지만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그녀가 예정된 죽음에 속해있으니까. 우리의 운명은 이렇게 흘러갈 예정이었던 걸까? 나는 이 흐름을 바꾸기 위해 뭘 해야 할까. 나는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계속해서 들려오는 지구의 소식을 듣고 가슴 졸이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전 지구는 유례없는 화합을 이루었다. 모두의 생존이 걸린 문제에는 다 같이 힘을 합치는 수 밖에. 우선 레이저를 발사 장치는 지구의 자전으로 인해 지각 위에 설치 할 수 없으니 태양 공전 궤도에 올려 놓았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나라가 협력을 하였으나 우주공간에서의 전력수급 불안정으로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핵폭탄을 소행성에 보낸다는 건 정말 영화에서나 볼법한 일이 맞았다. 우주공간으로 로켓을 발사한다는것은 항상 성공률 100%를 보장하는 일이 아니었다. 만약 우주로 나가기 전에 폭발해버린다면 그 하늘 바로 아래는 불바다가 될 것이고 반경 수십 킬로미터는 방사성 낙진의 피해로 초토화가 될 것이 확실했다. 그래서 어느 나라도 자신의 영공을 열어주려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전 지구적 연합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유일하게 남은 희망인 DART 미션은 태양이 방해를 했다. DART는 위의 방법들 보다도 훨씬 더 정교한 궤도 계산이 필요했는데, 하필이면 소행성은 태양의 바로 뒤쪽 방향에서 오고 있었다. 이는 관측을 방해했고 정밀한 계산이 불가능했다.

결국 DART 미션은 실패했고, 어떤 인류는 불운에 굴복했다. 전 지구적 화합은 깨졌고, 멸망에 관한 종교가 득세하고 바이러스처럼 퍼져갔다. 벙커를 파고 땅으로 숨어드는 이들도 있었고 땅위에선 문명사회의 도덕과 윤리가 위협받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포기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그 중에는 나와 그녀도 있었다. 하지만 막막하기만 하다. 우리는 멸망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 아니면 어떤 다른것이 필요한걸까.

그래,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소행성이 우주선에 부딪히지 않은 것은 불행이었다. 만약 우주선과 소행성이 부딪혔다면 궤도가 바뀌어 은하계 밖으로 날아갔을텐데.

지구와 소행성 충돌까지 1개월 남았다.

지구는 멸망으로 착실히 다가가고 어찌됐든 우리는 화성으로 나아갔다.

5.
창밖으로 보이는 화성의 붉은 땅이 빠른 속도로 지나친다. 우주선은 두 시간 전부터 화성 주위의 위성 궤도를 돌고 있었다. 지구가 멸망한다면 지금 이 화성 탐사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주선이 화성의 뒤편으로 막 접어들 때, 그녀로부터 신호가 날아왔다. 30분 뒤면 소행성이 지구 대기권에 진입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거리로 인한 통신 지연은 20분정도 이니 현재 지구에서는 10분 뒤면 소행성이 떨어질 것이다. 과연 어떻게 될까?
우리는 화성의 뒤편으로 넘어갔고 다시 지구가 보이는 앞쪽으로 나오기까지 수 십 분 동안은 지구와의 통신이 불가능하다. 과연 지구는 어떻게 되고 있는 걸까.

어서 빨리 지구와 통신이 다시 되길 바랄 뿐이다. 그런데 그녀의 계산이 틀릴 확률도 있지 않을까? 아슬아슬하게 지구를 스쳐지나갈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녀는 신기할 정도로 미래를 잘 예측하는 편이었다. 그 언젠가 그녀에게 물어봤었다.

"이걸 어떻게 예상한거야?"
"운이 좀 따라줬지."

내가 나의 운명을 손질해서 나온 결과들을 보며 의기양양하고 있을 때에도 그녀는 말하곤 했다.

"축하해, 행운이 네 편을 들어줬구나"

나는 그 말이 싫었다. 나의 노력이 그깟 운 따위에게 지고 싶지 않았기에.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운이 나빴다는건 핑계다. 그저 노력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충분한 노력은 운명을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다.

얼마전 그녀와 우연과 필연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던 것이 기억이 났다. 나는 그때가 주고 받은 화상 메시지를 켰다.

"나는 운명을 믿지 않아."

그녀는 내게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눈을 뗄 수 없는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리운 모습. 죽음의 순간을 함께 공유할 수 없다니. 이것도 운명일까?

"오! 저분이 늘 말하던 운명의 상대 인가요?"

죽음의 걱정을 지우려는듯 평소와 다르게 과장해서 너스레를 떠는 세렌(seren)의 얼굴이 위에서 불쑥 나타났다. 나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그녀를 살짝 밀쳤다.

세렌은 저 멀리서 다른 동료들과 불안을 지우기 위한 잡담을 나눈다.

"공룡도 이렇게 멸망했겠지?"
"지구 상의 대부분의 생명이 죽겠지.."
"어쨌든 우리는 운 좋게도 살아남겠네. 어쩌면 인류 중에 우리만 남을지도 모르겠어"
"이게 과연 운이 좋다고 할 수 있는 걸까요? "

지구상에서 우연히 생명이 발생했다면 이처럼 우연히 사라지는 것도 특별할 일이 아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목적 의식이나 감정이 개입되어있지 않다. 우리는 운으로부터 태어났고 불운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나는 시계를 쳐다봤다. 이미 결론이 났을 것이다. 인류는 멸망했을까? 운 좋게 살아 남았을까? 달리는 우주선에 채찍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우주선은 내달렸다. 우주 너머로 태양 빛이 보이고 이어 지구가 떠올랐다. 우주선에 탄 우리들은 지구로 부터의 통신을 기다렸다. 이대로 신호가 영원히 오지 않으면 지구는 멸망한 것이겠지.

나는 초조한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영상을 다시 재생했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나는 운명을 믿지 않아. 그래서 너를 만난 건 행운이야."

6.
6개월뒤 우리는 지구로 귀환했다. 그녀는 나를 웃으며 맞아주었다. 역시 화면보다는 실제로 보는 것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했다. 그녀는 말했다.

"운이 좋았어"

예상대로라면 소행성은 시베리아 한복판에 떨어질 예정이었다. 만약 그랬다면 근방 수 킬로미터는 폭격에 맞은듯한 피해를 입었을 테고, 이때 발생한 지진과 해일은 전 지구적인 피해를 입혔을 것이다. 그리고 하늘을 뒤덮은 소행성과 지각의 파편들은 하늘을 뒤 덮고 지구는 차갑게 식어가며 인류는 천천히 멸망해갔을 것이다.

하지만 인류는 운이 좋았다. 이미 죽은 세렌의 아버지가 지구를 구했다.

소행성이 대기권으로 진입하려던 순간, 우주를 빠른 속도로 떠돌던 세렌의 아버지가 타고 있던 우주선이 우연히도 소행성과 부딪혔다. 공중에선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고 이 폭발은 소행성의 궤도를 아주 살짝 바꿨다. 이렇게 각도가 틀어진 소행성은 지구의 지각에 비스듬하게 부딪혔고 절묘한 입사각으로 인해 다시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마치 물수제비를 하듯이.

물론 피해가 없지는 않았는데, 하필 소행성이 떨어진 곳이 한창 내전 중이던 국가의 친정부 세력이 집결해있던 도시였다. 소행성의 바뀐 각도 덕분에 위력이 많이 줄긴 했지만 도시 하나를 날려버리기엔 충분했다. 정부 주요인사 및 정부군은 완전히 궤멸했고, 내전은 이 우주적인 개입으로 종료되어 버렸다. 반군의 지도자는 새로운 국가를 세우며 우주로부터 당위성을 천명 받았다며 오른 손을 하늘을 향해 치켜 올렸고, 국민 모두들 이에 동조하여 열광적인 취임식이 연출 되었다. 그들에겐 진정으로 행운의 소행성이었다. 누군가에겐 불운, 반대편에겐 행운.

우리 우주인 4명은 기자회견을 했다. 그중 세렌은 그의 아버지와 관련된 일화로 주목을 받았다. Seren은 웨일스 어로 '별'이란 뜻이다. 동료들은 모두 다 그 뜻으로 이름을 지었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에 걸맞게 우주를 꿈꾼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그 이름을 지을 때는 다른 뜻을 담았다고 했다. Serendifity(의도치 않게 얻은 행운이나 예상치 못한 성공)가 그녀 이름의 본 뜻이었다.

운이 좋게도 우연히 소행성을 가장 빨리 발견한 나는 유명 인사가 되었고, 이것의 궤도 계산을 완벽히 해낸 그녀 또한 업적을 크게 인정 받았다. 우리는 세기의 커플로 세상의 환대를 받았다. 이쯤 되니 나도 운명에 대해서 조금 혼란스러웠다. 우리에게 벌어진 이 일들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내가 이 운명에 도대체 뭐라도 개입한게 있을까?

옆에 나란히 선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싱그럽게 웃으면서 이 모든 게 행운이라고 하겠지. 우리가 만난 것처럼.

(48.7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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