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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ㅇ 사용법
「ㅎㅇ 사용법」
나는 무엇이든 동그란 게 좋다. 네모보단 세모, 세보보단 동그라미.
둥그런 원이 좋다. 원. 그래서 내 이름을 사랑하나보다. 내 이름은 아빠가 지어주셨다. 하나밖에 없는 딸 이름을 꼭 자기가 짓고 싶었다며, 그렇게 탄생한 내 이름. 아빠 성과, 동그라미가 두 개 들어가는 내 이름. 의미 있고 소중한 이름이다. 누군가 나를 부를 때 입술이 동그랗게 모아지는 게 좋다.
행운.
행운도 그렇다. 두 음절뿐인 짧은 단어지만, 동그라미는 세 개나 들어있다. ‘행운.’ 초성을 보니 내 이름과 같다. 매일 한 번 이상은 듣는 내 이름. 동그란 이름이 불릴 때마다 행운이 찾아온다고 믿고 싶어진다.
보통 어떤 걸 겪어야 ‘운이 좋다’고 말할까? 대부분 로또 당첨 같은 일을 떠올린다. 평생 벌어도 가질 수 없는 돈을 단지 번호 여섯 개로 얻는 것이니까. 내가 쉽게 가질 수 없는 것을 우연히 갖게 되는 것. 별다른 노력 없이 덜컥 손에 쥐게 되는 것. 그게 정말 ‘행운’일까?
사람들은 행운을 거창하게 생각한다. 단어만 봐도 긍정적이고 밝고 좋다. 마냥 밝고 예쁜 행운을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오히려 눈이 멀어 불행한 삶이 된다. 지나친 욕심은 일상 속 작은 행운조차 놓치게 된다.
사실 세상에 대가 없이 주어지는 건 없다. 등가교환의 법칙. 법칙은 법칙이다. 행운은 내가 살아온 시간 속 한 부분의 기억을 골라 빼간다. 그게 행복한 기억이든, 힘들었던 기억이든. 나에게 줄 행운과 내 경험을 등가교환한다.
그러고 보니 내 생에 행운이란 게 있었나?
누구나 한 번쯤은 연예인을 가슴 속에 품고 산다. 난 어릴 때부터 유난히 티비와 컴퓨터를 좋아했다. 그래서일까. 소위 말하는 케이팝 교수님 역할을 하고 있다. 언제쯤 끝날지 모르는 무한한 덕질 생활에 여전히 즐거움을 느끼며 산다.
혹시 ‘덕계못’ 이라는 말을 아는가? ‘덕후는 계를 못 탄다’는 문장을 줄여 덕계못이라고 한다. 열심히 덕질해도 정작 본 적 없는 내 연예인을, 아무 관심도 없는 친구가 길 가다 우연히 마주친다는 이야기. 팬이란 그런 것이다. 좋아하면 못 보고, 안 좋아하는 사람은 본다.
4년 전 겨울이었다.
살다 보니 나에게도 이런 일이 생기는구나.
그날은 내가 좋아하는 밴드가 저녁 여덟 시에 깜짝 팟캐스트 공지한 날이었다. 팟캐스트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은 딱히 없었지만, 접속 인원에는 제한을 뒀다. 팬이 몇 명인데 겨우 500명만 접속할 수 있는 시스템이라니. 그래도 뭐 어때. 일단 들어가면 되는 거 아냐?
그 팟캐스트는 팬들과 직접 목소리로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즉, 내가 우리 오빠랑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엄청나고 대단한 공간이라는 건데… 하지만 잊지 말자. 덕계못의 법칙. 마음을 비우자. 그런 일은 쉽게 오지 않으니까.
그래, 쉽게 오지 않아. 그렇긴 한데 말이지. 기대하는 건 괜찮잖아? 내 안의 관종 본능이 문을 두드렸다. 500명이면 승산 있다. 아무리 내 이름을 사랑한다고 한들 세 글자의 둥그런 한글은 전혀 오빠들의 눈에 띄지 못할 것 같았다. 작전개시, 곧바로 닉네임을 바꿨다.
[ 루시 제 5의 멤버 ]
왜 5의 멤버냐고? 그 밴드는 4인조니까. 닉네임만으로는 부족해 보였다. 그럼 프로필 사진을 바꿔야겠구나. 나의 악기 베군(베이스 기타)을 들고 연습할 때 찍은 사진으로 바꿨다. 베이스 기타를 들고 있는 루시 제 5의 멤버.
솔직히, 이건 내가 봐도 승산이 있었다. 아니, 확실히 뭐 하나는 될 것 같았다. 행운은 원래 쉽게 오지 않으니 직접 확률을 높이는 수밖에. 한술 더 떠서 베이스 기타와 앰프까지 미리 준비했다. 두 큰술 더 떠서 루시 노래 중 내가 제일 아끼는 베이스 라인을 연습했다. 혹시 모르잖아. 내 연주를 들려줄 수 있을지?
저녁 여덟 시가 되자마자 빠르게 입장을 클릭했고, 선착순 500명에 들었다. 이거였다. 케이팝 덕후 짬이 여기서 나오는구나. 그 공간에 들어간 것만으로 행운의 신은 나의 뜻을 조금 들어준 거 아닐까? 사실 들어간 이후부터는 운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이름도 사진도 특별하게 바꾼 나를 알아봐 주는 건 이제 그들의 몫이니까. 그때였다.
“오, 제가 임의로 고르는 거지만. 이분 좀 특이한데요? 일단 아이디가 심상치 않습니다.”
“루시 제 5의 멤버”
“베이스를 치고 있네요?”
? 뭐지 이거. 나 꿈인가. 진짜다. 이거 실전이다. 행운의 신이시여.
보컬 멤버가 눈에 띈다며 나를 골랐고, 마이크가 켜졌다. 떨리면 염소 목소리나 난다던데. 염소는 무슨, 난 내 성대에 진동기가 달려있는 줄 알았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하니 어떤 걸 담당하냐는 물음에 베이스 기타로 응답했다.
‘우웅-.’
아니나 다를까, 월척이다. 2초 남짓한 베이스 소리 하나로 오빠들을 이렇게 웃길 수 있다고? 난 진짜 다 가진 여자야. 웃음이 조금 잦아든 후, 연습한 베이스 라인을 연주했다.
“제자로 모시고 싶은데 레슨 받으러 오지 않을래요?”
5분 정도의 짧은 대화가 마무리 된 후, 나는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BPM 250으로 뛰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내 생에 이런 날도 오는구나. 덕계못 깰 수 있는 거구나. 처음으로 인생에 큰 운을 맛보았고, 짧은 5분이 달콤한 케이크처럼 느껴졌다.
운은 그냥 오지 않는다. 분명 그날의 행운은 내 인생의 한 부분을 가져갔을 것이다. 운처럼 보이지만 그날 나는 운을 감지했고, 준비했으며 붙잡았다.
운은 세상을 날아다니다 가끔 내 머리 위에 쉬어간다. 어떤 날엔 너무 가벼워서 모르고, 또 어떤 날엔 너무 무거워서 알아차리게 된다. 운은 먼저 두드리지 않는다. 그 무게를 아는 건 나 자신이다. 다만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얼마나 노력했는지 운은 알고 있다.
행운은, 살다 보면 온다. 그러니까, 그냥 살자.
행운이 기분 좋게 가져갈 인생의 재미나고 동그란 기억을 많이 만들면서.
난 오늘을 산다.
오늘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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