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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行雲)
(최종본)
제목: 행운(行雲)
나는 여행 중에서도 완전히 새로운 환경을 마주할 수 있는 해외 여행을 좋아한다. 휴학을 하고, 이때다 싶어 돈을 모아 해외여행을 실컷 다녔다. 엄마가 “역마살 꼈니?” 물을 만도 했다. 내 여행은 두 달이 최대 쿨타임(?)이다. 1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일본, 홍콩-마카오, 체코-오스트리아-스위스, 이탈리아로 각각 두 달을 넘기지 못하고 다녀왔다. 그러다보니 체코-오스트리아-스위스를 갈 때는 여행 자금이 부족해 엄마 몰래 적금도 조금 빼서 썼다.
일단 행선지가 정해지면 교보문고에 가서 그 나라 언어 입문 서적을 하나 산다. 통달은 못해도 인사말, 감사말, 식당 주문 정도는 공부하고 간다. 식당에 들어서서 직원들과 인사하고 맛있는 음식을 주문할 나를 떠올리며. 사실 이때부터가 여행의 시작, 설렘 시작이다.
내 여행은 맛집 탐방 위주로 이루어진다. 맛집을 예약하지 않고도 들어가게 되었을 때 가장 짜릿하다. 일본 가기 전에는 아예 음식이나 주문만 일본어로 공부하는 책을 사기도 했다. 가서는 결국 번역기를 꺼내들거나 아니면 그나마 자신있는 영어를 쓰게 되겠지만, 한번이라도 배워간 말을 써먹으면 성공이다. 이탈리아 가기 전에는 나름 열심히 이탈리아어를 공부해서 “아름답네요!(che bella 께 벨라!)”라는 감탄문까지 진도를 뺐다. 귀여운 강아지나 아이를 볼 때마다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길 가던 아시안 여자가 서투른 말투로 “아름답네요!”라고 하면 그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발음 탓에 내 말을 못알아듣는 어색한 상황이 오진 않을까, 내가 표현을 다르게 기억하고 있는건 아닐까, 떨리는 마음이 컸다. 결국 나름 어렵게 배워간 고급 문장들은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ciao(안녕하세요)”나 “grazie(감사합니다)” 같은 단순 인사말만 쓰고 왔다. 뭐, 인사라도 많이 했으니 만족한다. 그래도 현지인들 대화 중 하나라도 아는 말이 들리면 친구들에게 꼭 아는 체를 해줬다.
얼마냐고 물어보고 숫자로 대답하는, 계산 관련 표현도 종종 외워간다. 홍콩에 갔을 때 숫자를 중국어로 외워간 내가 계산을 담당하고 있어 꽤 으쓱했다. 한번은 동성로의 중앙떡볶이만큼 바쁜 현지의 한 간식가게를 찾은 적이 있다. 그런데 식당 사장님이 우리가 돈도 안 냈는데 잔돈을 주시는 게 아닌가.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받은 돈을 도로 내밀며 멀뚱멀뚱 사장님을 바라보고 있었더니 사장님이 내게 중국어로 뭐라뭐라 쏟아부으셨다. 내가 그중 알아들은 것은 “팅부동(얘네 말귀 못알아먹네. 정도로 의역할 수 있다)”뿐이었다. 못 알아듣네만 알아듣는 나의 기초적인 언어실력이란. 다행히 어떤 언니가 오더니 한국어로 “괜찮아~” 하면서 영어, 중국어, 한국어를 섞어가며 통역 해주어서 잘 해결되었다. 해결된 뒤에 친구랑 ‘못 알아듣네만 알아들은 사건’에 대해 얘기하며 한바탕 웃었다. 사장님은 우리가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사장님께는 죄송하지만 재밌는 추억으로 남은 사건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그 나라를 배경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도 본다. 홍콩을 가기 전에는 중경삼림重慶森林(1994)을 보고 가야한다. 중경삼림 ost는 요즘도 에어팟으로 걸어다니며 듣는다. 오래된 영화지만 아직도 명작으로 손꼽히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것 같다. 마카오 가기 전에는 궁(2006). 드라마 궁의 여주와 남주가 마지막회에서 결혼식 장면을 찍은 작은 해변 마을이 있다. 직접 가보니 정말 작은 마을이지만 에그타르트가 맛있는 카페가 있고 곳곳에서 결혼식 장면의 감동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마카오 가기 전에는 드라마 궁을 보고 가야한다(!!)는 나의 주장이 얼마나 공감을 살 지 모르겠지만, 역경을 딛고 이루어지는 사랑 이야기에 과몰입해서 보는 편이다. 마지막에 두 사람이 결혼할 때는 입이 귀에 걸린 채 감상하며 '나중에 꼭 저기 가봐야지' 생각했다. 이탈리아를 가기 전에는 종이의 집(2017)을 봤는데, ost인 ‘bella ciao’가 이탈리아 대표 가요곡을 리메이크한 것이었다. 왜 대표 가요곡인지 알겠는, 단박에 중독성 넘치는 곡이라 한참을 들었다. 계속 들었기 때문일까. 밀라노 대성당 천장 위를 걷다가(성당 위를 걷는게 하나의 체험이다) 어디선가 bella ciao가 들리는데? 했더니 밀라노 대성당 앞에서 현지인이 색소폰으로 bella ciao를 연주하는 중이었다. 여행 중 마주친 행운 같았다.
그래서 여행 다녀와서 남는 게 뭐냐고? 나는 여행을 가서 고매한 인생의 깨달음을 얻거나 내 자신의 한계를 마주하거나 부처님처럼 돌아오진 못한다. 여행은 잊을 수 없는 추억만 남기는 것 같다. 생산적인 활동은 확실히 아니다. 여행을 다녀오면 현생을 더 활기차게 잘 보낼 수 있다고 하는 사람도 물론 있지만, 나는 긴 여행 후에는 피곤하고 일상에서 재미를 찾을 수 없어 더 무기력해진다. 가끔 여행 사진을 보다가 다시 가고 싶어 눈물이 날 때도 있다.(바로 어제도 체코에 다시 가서 강가의 카피바라에게 당근도 주고 클래식 공연도 보고 싶어 눈물이 찔끔찔끔 났다) 초등학교 때는 부모동행체험학습으로 1주일간 터키 여행을 다녀온 후, 월요일 아침에 "다시 학교 가기 싫다"고 펑펑 운 기억도 있다. 여행 후유증이 심한 편이다. 결국 여행을 또 떠날 수 밖에 없을 만큼.
여행이 추억 외에 남긴 게 별로 없고 가끔 현생을 우울하게 만든다고 해도, 내게는 소중하다. 나는 여행에서 무얼 얻으려 가는 게 아니다. 여행은, 내게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다. 길수록 좋다. 멀수록 좋다. 언제 또 2주 이상의 긴 여행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니, 자그마치 2027년 겨울은 돼야 가능할 것 같다. 겨울 여행은 크리스마스쯤이 낭만 넘치니까, 내후년 크리스마스까지 손꼽아 기다려야겠다. D-916. 얼른 오면 좋겠다. 바쁘게 취직 준비를 하다 보면 여행을 잠시 잊고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슬프게도 해외 여행에는 비행기 값이 많이 든다. 항공사에 취직해서 할인받으며 놀러다닐걸, 하는 생각까지 해봤다. 내 닉네임은 구름이다. 구름은 교통비 없이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으니 부럽다, 나도 구름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에 그렇게 정했다. ‘행운’에는 행운(幸運)도 있지만, 행운(行雲)도 있다. 둥둥 떠다니는 구름, 행운처럼 살고 싶다. 여행운(旅行運)이 내게 자주 찾아오면 좋겠다.
(15.5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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