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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

(최종본)

일기일회

평생에 단 한 번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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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면서 늘 마시던 플라스틱 통에 담긴 우유를 마시려 했는데 그날 유독 뚜껑이 안 열렸습니다.

한자리에서 온 힘을 다해 뚜껑을 열어 보지만 실패. 아무도 저를 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좀 민망해져서 자리를 옮긴 다음에 다시 시도했습니다.

또 실패했습니다.

이빨로 깔까.. 라는 생각을 하던 찰나에 어떤 아주머니께서 "열어 줄까?" 하고 다가오셨어요. 진짜 도저히 무리였어서 "네.." 하고 드렸습니다. 그리고 아주머니도 실패하셨어요. 본드칠을 해 놨나..

그런데 아주머니께서 우유를 들고 모르는 아저씨한테 가셨습니다(???) 모르는 아주머니는 모르는 아저씨에게 뚜껑 열어 달라고 해서 열어 주셨습니다. 싱글벙글 열었다며 저한테 건네주셨어요.

어리둥절하게 감사 인사를 하고 있으니 아저씨께서 제가 딸이냐고 여쭸습니다.

"아니요.."

웃으시는 두 분. 그렇게 두 분께 꾸벅꾸벅 감사 인사를 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요즘처럼 남 신경 쓰지 않고 팍팍한 세상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는 거. 그 친절을 받는 게 행운이라고 생각됩니다. 10분 채 안 되는 짧은 순간이었고 어떻게 보면 별거 아니지만 굉장히 좋은 기억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기차역에서 만났기에 같은 지역 사람이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인생에 단 한 번뿐인 인연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없던 인류애도 생기게 해 주는 좋은 인연들은 제 마음을 너무 따뜻하게 해 줍니다. 좋은 인연들은 걸어 다니는 행운 그 자체입니다.

가장 최근 초면의 행운도 있습니다.

2025년 1월 10일 제 생일. 친구와 강원도에 놀러 갔습니다.

차 없는 뚜벅이들은 새벽 도착이라는 계획을 짜 버려서 케이크는 구하지 못했습니다.

“육회에 초 꽂자”
“좋다”

술집에 갔습니다.

육회 품절. 도전했던 과일소주도 맛이 없어서 전부 남겼습니다.
열심히 궁시렁거리며 밥을 먹던 중 옆 테이블에서 케이크에 초를 꽂고 축하 노래가 들렸습니다.

“저분들도 오늘 생일인가 봐” 같이 박수쳐 줬습니다.

손님이 저희밖에 없어서 케이크 한 조각을 나눠 받으며“ 헉, 감사해요. 저도 오늘 생일인데 생일 축하드려요” 했습니다.

“아~ 저희 생일이 아니라 삼재 파티했어요“ 무슨 파티요? 살면서 처음 듣는 파티였습니다.

좋은데? 우리도 삼재 때 삼재 파티하자. 그렇게 받은 삼재 케이크에 초를 꽂아 냅다 제 생일 케이크로 만들었습니다.
행운이었죠. 생일에 케이크를 나눔 받은 행운에서 끝난 게 아니라 삼재를 파티로 탈바꿈시켜 버린 분들의 마인드가 엄청나다고 생각했습니다.

인생의 가장 큰 불운 시기를 행운으로. 그런 마인드를 가진 분들을 만난 행운. ‘우리도 하자.’ 닮을 기회를 준 행운.

마찬가지로 이분들도 두 번 다시 볼 일 없는 분들이었습니다. 아마 엄청난 인연으로 다시 본다고 해도 외모는 기억이 안 나서 못 알아볼 것 같습니다. 살면서 처음 가 본 지역에 처음 가 본 매장에서 만난 초면의 행운들이었습니다.

본인들도 제가 자신들을 행운으로 여기고 있는지 모르실 겁니다. 인연이 행운이라는 말. 너무 좋다고 생각됩니다. 저도 누군가에게 행운이 될 수 있다는 얘기잖아요. 제가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는 저를 만난 걸 행운이라고 여겨 줄 수도 있다는 얘기잖아요. 내가 걸어 다니는 행운이 될 수 있다니 너무 설레지 않나요. 저에게 이런 좋은 기억들을 남겨 주신 분들처럼 저도 누군가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게끔 세상을 조금 친절하게 대하려고 합니다.

"항상 응원하고 작업은 그만두지 말아 주세요. 이렇게 빕니다."

실제로 저에게 감사 인사를 해 주신 분들이 계십니다. 저로 인해 인간관계가 좋아졌다고 하신 분도 계셨고, 우울증이 개선되었다고 하신 분도 계셨고, 행동이나 생각하는 면에서 배움이 많았다고 하신 분도 계셨습니다. 작가 활동을 하는 중인데 작품을 팔아 줘서 감사하다고 해 주신다거나, 활동해 줘서 감사하다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감사 인사를 들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누군가에게 내가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게, 누군가의 기억에 제가 남을 수 있다는 게 좋습니다. 제가 살아가는 데에 있어 굉장히 큰 원동력이 됩니다.

두 번 다시 볼 일 없을지라도 돌이킬 수 없는 순간에서 '싫은 사람'으로 인식되고 싶지 않습니다. 안 좋은 이미지로 기억에 남아 있고 싶진 않습니다. 누군가의 불운으로 남아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항상 행동을 조심히 하려 노력하고, 말조심하려 노력합니다. 세상은 생각보다 굉장히 좁고 인연은 돌고 돕니다. 오늘 스쳐 지나간 인연이 친구의 친구일 수도 있는 일입니다. 안 좋은 사람으로 인식되어 봤자 좋은 일은 하나도 없으니까요.

계속 함께하고 있는 인연들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스쳐 지나간 인연들도 분명 저의 일부입니다. 작은 기억들이 모이고 모여 지금의 저의 행동에 영향을 줬습니다. 절대 '사소한'일이 아니란 거죠. 나의 행동이 타인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나의 일부분이 타인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건 아주 조심스럽고 모든 신경을 다 써야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만큼 굉장히 두근거리고 멋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일기일회'는 사실 단순히 '평생에 단 한 번 만남'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본의 다도 문화에서 유래되었는데, 차를 대접하는 주인과 손님 모두가 차를 마시는 순간을 '일생에 단 한 번뿐인 만남'이라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한다고 합니다. 삶의 모든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기에 항상 현재를 소중히 하자는 의미입니다.

누구나 걸어 다니는 행운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행운을 기억하고
누군가는 제가 행운이라고 기억해 주길 바랍니다.

(14.0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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