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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이 건드리고 간 사람들 정말 혼자일까요

(최종본)

제목: 불행이 건드리고 간 사람들은 정말 늘 혼자일까요?

<시인의 말>
“불행이 건드리고 간 사람들 늘 혼자지.”
헤르베르트의 시구를 자주 떠올렸다.
한 사람을 조금 덜 외롭게 해보려고 애쓰던 시간들이 흘러갔다.

진은영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를 처음 읽었을 때가 2022년 추운 겨울이었을 겁니다. 당시 저는 사랑에 미친 인간이었습니다. 사랑만이 전부인 사랑 중독자였어요. 도무지 세상에 붙들고 살아갈 무언가가 없어서 오직 사랑에만 목을 매던 시기였습니다. 그때 한 여자 아이를 알게 됐는데, 그 아이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인스타에서 우연히 알게 된 그 아이의 이름은 김사랑(가명). 그녀는 20살, 저는 28살이었습니다. 저는 그 아이를 알기 전, 동거하던 애인이 스스로 세상을 등지면서 심한 우울증과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알코올 중독으로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사치라고 생각해 따로 개인적인 연락을 주고 받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녀가 sns에 올리는 글들이나 음악취향, 이미지들은 저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다 그 아이가 쓴 글에서 저랑 같은 아픔이 있다는 걸 우연히 알게 되었고, 실제로 얼굴 한 번 본 적 없었음에도 그녀가 저랑 같은 냄새가 날 것 같은 인간이라고 은연중에 생각했습니다. 그 냄새에 서서히 취해버린 저는 결국 용기내 그녀에게 먼저 연락을 했고, 그 애를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져버렸습니다.

그 당시 처음 사랑을 고백했던 편지를 옮깁니다.

‘마음만으로는 되지 않던 일들이 마음만으로 가능한 일들이 됐어요.
불행이 건드리고 간 사람들 늘 혼자라는 말을 들었어요. 결국 나는 그렇게 될까요? 반나절 보려고 반나절을 가고 서로가 있는 돌아갈 집을 같이 만들어요. 당신을 모르고 무르게 살아온 게 미안해요. 눈을 더 또렷이 뜰래요.
어느 구석에서 쓰러져도 죽지는 않을래요. 더 이상 적당히 사랑하는 사랑은 하고 싶지 않아요. 사랑해요. 마음껏 찌르고 도망가요. 이제 죽음보다 무거운 약속을 하고 거기에 누워요.’

다시 읽어보니 제가 정말 지독한 사랑에 빠졌었구나 싶습니다. 살아보려고 묻어둔 감정들이 되살아나네요. 그렇게 저희는 연인이 되었습니다.

감각도 감정도 다 죽어서 잿더미가 되었다고 생각하던 제가 그 아이를 만나면서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다시 불이 붙었습니다. 제가 예감했듯, 그 아이도 저랑 비슷한 정신질환이 있었고 저희는 서로의 아픔을 위로해주며 그 관계에 중독되어 갔습니다.

저희는 안 먹어본 약이 없었습니다. 세상이 정해놓은 틀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너무 쉽게 합법과 불법 사이를 오갔습니다. 그렇게 세상에 둘만 남아있는 것처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만남을 지속하고 깊어질수록 조금씩 이상함을 느꼈습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던 제가, 이 아이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무언가 잃게 될까 무서워진 겁니다. 사랑하니까 더 좋은 곳에 데려가고, 더 맛있는 음식을 먹이고, 더 좋은 영향을 주고 싶어지는데.. 우리의 현실은 진창에 처박혀서 온갖 것들에 취한 채 그저 서로를 끌어안고 서서히 망가지고 있었으니까요.

같이 죽어줄 수 있을 만큼 사랑하는 존재가, 어느새 같이 살아가고 싶은 존재로 바뀌어갔습니다. 그때부터 저희는 조금씩 어긋났습니다. 저는 같이 살자고 얘기하고 그 친구는 같이 죽자고 매달렸습니다.

결국 그 아이는 저 대신 그걸 이루어줄 사람들을 찾았고 그중 하나와 바람을 피워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실감은 처음이었습니다. 분명 더 이상 밑바닥이 없을 것 같은 바닥에 있었는데.. 그 아이와 이별하니 지옥보다 더한 지옥이 있더라고요. 큰 상처 뒤에 간신히 얻은 희망마저 잃은 저는 더 심하게 망가져갔습니다. 매일 술에 취해, 약에 취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음주운전으로 사고를 냈습니다. 저는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고 부모님은 저를 지키기 위해 정신병원에 집어넣었습니다.

사실 병원에서의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매일 안정제 주사를 맞아야만 잠을 잘 수 있었고 낮에 눈을 뜨고 있는 것도 힘들어서 잠만 잤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렇게 시간 감각을 잃어버린 채 세월을 흘려보내다가 결국 일년 만에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스스로 죽어버리지 않기로 결정한거죠.

다시 살아보려고 다짐한 제게 가장 중요한 일은 먹고사는 일이었습니다. 지인의 소개로 정육점에 취직했습니다. 음주운전 사고로 생긴 2억이라는 빚도 갚으면서 향후 진로에 도움이 될 기술을 배우는 게 여러모로 좋겠다는 판단에서였습니다. 정말 최선을 다해 일했습니다. 보람도 있었고 이 직업이 평생의 업이 되어도 좋겠다는 마음도 생겼습니다.

그렇게 저는 조금씩 안정을 찾으며 1년6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여러분, 불행이 건드리고 간 사람들은 정말 늘 혼자인 걸까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저는 직장에서 부당하게 해고를 당하게 됩니다. 자초지종을 다 얘기할 순 없지만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는 이 상황이 너무 억울하고 불같이 화가 끓어올랐습니다. 왜 자꾸 나한테 이런 일이 벌어질까, 괴로워하고 낙심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다시 공허하고 외로워졌습니다. 여전히 아무도 제게 잘 사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는다는 생각에 깊은 슬픔에 빠졌습니다.

근데요, 이번에는 뭔가 달랐습니다. 슬프다가도 제 안에서 어떤 알 수 없는 에너지가 나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뭐라도 붙들지 않으면 살아가지 못하던 제가, 그래서 사람과 약물에 의존할 수 밖에 없던 제가, 이제는 혼자라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남몰래 악을 쓰며 버팁니다. 네, 여러분! 저는 다 이길거에요. 다 가질 겁니다. 하고 싶은 거 다 할거고요. 다 이룰 거예요. 정말입니다. ...그걸 위해서 전처럼은 망가지지 않기로 했습니다.

지금 스스로 혼자라고 느끼시는 분들이 있다면 묻고 싶습니다. 이 모든 불행들이 다 미리 정해진 것이라면 여러분들은 그것에 그저 순응하실 건가요? 어느 시인의 말처럼, 불행이 건드리고 간 사람들은 정말 늘 혼자여야만 할까요?

제 답은 달라졌습니다. 과거 힘들 때마다 머릿속으로 늘 떠올리던 문장이 있습니다.

“나의 회복은 길고 지루하며 쉽게 길을 잃는다.”

저에게는 더 이상 길 잃는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이제는 그 지루하던 회복의 과정도 기대되고 기분 좋은 설렘으로 변했습니다. 어쩌면 진정한 회복은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닐까요? 설령 혼자라고 해도 저는, 그리고 우리는 괜찮을 겁니다. 영원히 혼자이지만은 않을 겁니다. 저의 존재가 그 증거가 될 테니까요.

(16.3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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