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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

무료하다. 깃을 한껏 세운 다홍빛 코트가 인상적인 그녀는 몇 시간째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담배나 뻐끔뻐끔 피워대며. 광장에 앉아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뭐라도 조금 달라질까 해서 나왔는데. 저기 저 소녀들은 뭐가 저렇게 즐겁단 말인가. 요즘 그녀에겐 즐거운 일이라곤 없다. 한때는 자신도 세상의 모든 것이 궁금하고 재밌었던 것 같은데. 책 읽기도 커피를 마시는 일도 그저 그렇다. 사랑이라도 하면 좀 다를까. 담배라도 있어 다행인 건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녀처럼 몇 시간째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있다. 삐뚤빼뚤 적어 내려간 팻말과 함께. 앞이 보이지 않는 그 노인은 그저 들을 뿐이다. 자신의 앞으로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발걸음, 사람들의 웃음, 자동차와 바람 소리를. 가끔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면 손을 들어 감사 인사를 전하며. 그때 여느 사람들과 다름없이 자신의 앞을 지나가다 발걸음을 돌려세우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뭔가를 거침없이 써 내려가는 소리도. 노인은 자신의 앞에 있는 그 사람의 신발을 만져본다. 사람을 알아보고 구분하는 나름의 방식이다.

다홍빛 코트의 그녀는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장님 앞에 선 저 여자는 도대체 뭐 하는 걸까. 쪼그려 앉아 뭘 쓰는 것 같은데. 설마 조롱을 하려는 건 아닌지 노심초사하며 바라본다.

IT'S A BEAUTIFUL DAY AND I CAN'T SEE IT.
아름다운 날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걸 볼 수 없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노인에게 동전을 던진다. 갑자기 잦아진 동전 소리에 노인은 얼떨떨하다.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에 종이판의 문구를 고쳐 써 준 여자가 다시 등장한다. 노인은 신발을 만져 여자를 알아본 뒤 질문한다. "What did you to my sign? 내 종이판에 뭐라고 썼나요?" 그러자 여자는 웃으며 대답한다. "I wrote a same but in different words. 뜻은 같지만, 다른 말들로 썼어요."

얼떨떨한 사람은 노인만이 아니었다.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그녀도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 얼떨떨한 참이었다. 조금 달라졌을 뿐인 말이 타인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 사람처럼 벌떡 일어섰다. 아름다운 오늘을 그냥 흘려보낼 순 없으니. 자신의 일상에 '무료하다'라는 단어가 아닌 다른 단어를 붙여보기 위해.

(6.2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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