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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
두터운 옷 안으로 땀이 찼다. 매일 자전거로 내달리던 광장이 더 넓게 느껴졌다. 양쪽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고 시선을 떨어뜨린 채 걸었다. 벌써 이곳에서 지낸 지 석 달째다. 어제는 몇 유로 받지도 못하고 자전거를 중고로 팔았다. 샌드위치 가게 아르바이트생은 알아듣지 못할 단어를 섞어 말을 걸었다. 회색 보도블럭 위로 바쁘게 오가는 발이 눈에 들어왔다. 출근하는 길이겠지, 서러워졌다. 벤치에 앉아 웃고 떠드는 학생들을 보니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여기서 나고 자란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을 가지기 쉬울 리가 만무했다. 이력서를 20개째 내도 연락 오는 곳은 없었다. 마트에서 부모에게 종알거리는 아이가 부러웠다. 어학원에 돈을 퍼부은 실력보다 아이가 더 유창했다. 워홀러는 무슨, 외노자 신세지, 몇 달 전 친구들과 가진 술자리에서 자조했던 자신의 주둥이를 비틀고 싶었다. 실실 웃을 때가 아니었는데, 누가 안 말리면 나라도 나를 말렸어야 했는데.
어느새 신발 앞코로 땅을 차며 걷고 있었다. 어깨가 결려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에 계단 앞 바닥에 앉은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종이상자를 깔고 앉아 있었다. 아닌 척하며 계단 쪽으로 걸었다.
‘I’M BLIND. PLEASE HELP’
오랜만에 영어로 된 글자를 보니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해석하고 보니 부끄러웠다. 안 보입니다. 도와주세요. 나는 누구에게 도와달라 할 용기도 없었다. 지갑에서 지폐와 동전을 번갈아 만지작거렸다. 고민하다 발걸음을 서두르며 깡통에 동전을 던졌다. 죄송합니다, 몸도 마음도 가난하네요, 한국말로 중얼거리며 다시 고개를 파묻고 걸었다.
할 일이 없어도 광장에 나왔다. 이튿날 보니 박스 위에 앉은 사람의 표정이 보였다. 무엇을 보려는 듯 미간에 힘을 주고 눈을 깜빡거렸다. 다음 날은 하얗게 센 머리와 콧수염이 보였고, 그다음 날은 손으로 뜬 듯한 까만색 목도리가 보였다. 그의 움직임은 박스를 넘지 않았다. 언제쯤 자리 잡는지 궁금해 새벽같이 광장으로 향했다. 풍경의 일환인 양 앉아 있었다.
샌드위치 가게 말고 다른 곳에서 밥을 먹겠다고 다짐한 날이었다. 습관적으로 쳐다보는 계단 앞쪽이 붐비고 있었다. 심장이 빨리 뛰어 걸음을 재촉했다.
‘IT’S A BEATIFUL DAY AND I CAN’T SEE IT‘
사람들 어깨 너머로 바닥에 쌓인 동전이 보였다. 종이에 써진 문구가 바뀌어있었다. 아름다운 날, 이곳에서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는데, 동전을 건네는 사람들 얼굴에서 미소가 보였다. 응원의 말을 건네는 목소리를 들으니, 오늘이 조금은 아름다운 것 같았다. 부러워요, 아름다운 날을 만드셨네요, 속으로 말했다.
궁금해졌다. 어떤 심경의 변화로 저런 문구를 쓰게 되었을까, 나는 왜 자꾸 남의 인생을 기웃거릴까, 다음 날은 물어보리라 마음먹었다.
계단 다섯 칸 정도 위에 앉아 광장을 바라봤다. 우뚝 서 있는 동상이 보였고, 고풍스러운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막상 말을 걸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주저하는 중에 까만 선글라스를 낀 사람이 박스 위에 앉은 사람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앉아 있던 사람이 빨갛게 부르튼 손으로 앞에 선 구두를 더듬었다. 가늠되지 않는 상황에 어깨가 올라갔다. 만약 괴롭히는 사람이면 어느 나라 말로 쫓아야 하지 고민하는데 대화 소리가 들렸다. 저 행인이 문구를 바꿔 써 준 모양이다. 앉은 사람이 거푸 고맙다고 말했다. 긴장이 풀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구두 소리를 따라가고 싶었다. 저한테는 어떤 멘트가 필요할까요.
유학원 상담 테이블에 앉아 나라를 고르던 때가 떠올랐다. 어느 나라가 가장 좋나요, 묻는 말에 상담 선생님이 곤란한 표정으로 웃었다. 좀 물어볼 수도 있지, 머쓱해했던 자신이 한심했다. 계단에서 일어났다. 자주 가던 샌드위치 가게로 내달렸다. 문을 벌컥 여니 직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크게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
“I need work. Do you have.”
요란한 종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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