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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서민은 정치적 이슈에 의견이 분명한 기생충학자이다. 서울대 의대 박사, 단국대 교수, 칼럼리스트의 타이틀을 가진 초엘리트이기도 하다. 그의 글은 자주 주목 받는다. 번쩍거리는 배경과 스펙의 갑옷을 입고 문장의 파워를 잘 휘두를 줄 알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최대치로 활용할 줄 아는 영리한 사람이다.
그의 글을 찾아 읽었던 때가 있다. 칼럼이라는 매체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파워를 부여받은 보통의 유력인사들과 다르게 그는 핵심을 바로 공격한다. 그가 쓴 칼럼은 오래 벼르다 기다렸다는 듯 날리는 펀치같다. 문장 속의 그는 신이 나있고 생각을 펼치는 데 거침이 없다. 그는 비판받아 마땅한 대상을 속 시원한 문장들으로 후려 갈기며 유명세를 획득해왔다.
그가 2013년도에 쓴 윤창중에 대한 칼럼은 독자들에게 일종의 카타르시스마저 느끼게 했다. 결과적으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문제는 그가 사안을 다룬 논리와 방식으로 인해 사건의 심각성이 희석되었다는점이다. 사회전반에 만연한 (성)폭력에 대한 인식문제가 윤창중 개인의 추태와 박근혜 정부의 부적절한 인사문제로 축소되어버렸다.
윤창중은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의 미국 방문길에 청와대 대변인으로 동행해 여자 인턴의 신체부위를 만지는 추태를 부린 자다. 나라 망신을 제대로 시킨 기자출신 정치인인 그의 스펙은 서민 못지않게 화려하다. 만약 이 사건이 아니었다면 2024년 현재까지도 정치판에서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을 사람이었다.
정치판의 성추문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 이 사건이후 2017년에는 충남도지사 안희정, 2019년에는 부산시장 오거돈, 2020년에는 서울 시장 박원순의 성추행 사건이 이어졌다. 언론과 미디어가 성폭력을 다루는 방식은 사회문화적 인식에 기반한다. 윤창중의 추태는 한동안 가쉽처럼 지면을 떠다니다가 사라졌다. 그는 직업을 잃었을 뿐 처벌받지 않았다. 미국에서조차 공소시효만료로 사건종결되었다.
한때 열성 페미니스트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던 서민은 이 칼럼에서 피해자가 당한 일을 신체부위를 특정하여 명시함으로서 2차가해를 한 것이나 다름없다. 지도층 지식인의 수치심이 글 전반에 난무하지만 피해자에 대한 존중은 보이지 않는다. 피해자는 대상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나는 누구보다 재미있는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재미'를 인생의 나침반으로 삼고 있는 내게 서민의 글은 취향적이다. 그러나 공적인 글에는 재미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있다. 그건 의미다. 의미있는 글은 자주 불편하다. 의식아래로 눌러둔 것을 끌어올려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그때 드러나는 것들이 의식 전환의 재료가 된다. 변화는 불편함에서 만들어 진다. 서민의 이번 칼럼은 재미는 충족시켰지만 의미를 놓쳤다. 그는 윤창중 사건을 개인의 추태 정도로 축소시켜 우리 문화의 수많은 다른 윤창중을 보호해준 셈이되었다.
성폭력은 대상이 성별화된 폭력이다. 폭력은 개인의 문제처럼 보이기 쉽지만 사회적 현상이기도 하다. 내가 서민의 칼럼에서 읽고 싶었던 것은 사회지도층이라 불리는 이들의 폭력행사가 시사하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권력형 폭력에 대한 비판이었다. 글읽는 재미와 카타르시스는 다른 곳에서 충분히 얻을 수 있다. 그에게 부여된 힘은 우리에게 재미를 주기위해서가 아니라 모두가 외면하고 있는 것들을 제대로 보게 하기 위해서이다. 칼럼에서 내가 본 것은 서민이 속한 지도층 엘리트 문화의 성폭력에 대한 인식정도이다. 그래서 더욱 심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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