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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듬 훔치기
읽는 것을 좋아한다. 책을 좋아하진 않는다. 내가 흥미를 느끼는 것은 기록물이다. 요인이 남긴 메모나, 기관에서 생산한 보고서 등 쉽게 확보할 수 없는 기록에 관심이 많다. 보통 그것들은 비밀스럽게 다뤄진다. 외부에 공개되면 사회적 파장이 생길 수 있는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법률적, 도덕적 문제가 없는 내용이더라도 설왕설래가 생길 수 있다. 그것들은 대부분 갈색 봉투에 담겨있다. 난 그 봉투의 바삭거리는 소리만 들어도 신이 난다.
중학생 때였던 것 같다. 가족들과 광주에 놀러갔다. 아빠가 그렇게 끝내준다는 한식집에 가서 끝내주는 식사를 했다. 식당 근처엔 5.18 기념관이 있었는데, 식사를 마치고 가족들과 그곳에 들렀다. 별 생각 없이 둘러본다. 대부분 신문이나 교과서에서 본 사진들이다. 전시물들을 스쳐가고 있는데 구석에 어두컴컴한 열람실이 있었다. 비좁고 음산한 열람실 입구에는 '노약자 및 임산부 열람금지' 경고 팻말이 있었다. 난 노약자나 임산부가 아니다. 들어가서 앨범을 펼쳐본다. 머리가 산산조각 난 희생자의 사진이 있었다. 사진 밑에는 희생자의 신상과 탄환이 머리를 관통했다는 무미건조한 설명이 있었다. 그 외에도 많다. 내장을 쏟은 채 아스팔트 위에 널부러진 시신. 비교적 생전의 모습과 다를 바 없는 시신 등. 그 두꺼운 앨범은 적나라한 희생자 사진과 무미건조한 설명들로 이뤄져 있었다. 앨범 속 희생자 대부분은 계엄군의 5.56mm 탄환으로 죽었다.
5.56mm X 45mm NATO 탄(이하 556)은 1960년대 미국에서 개발됐다. M16이 육군 제식 소총으로 채택되자 전용탄으로 함께 개발됐다. 즉 M16과 556은 운명공동체인 것이다. 펜타곤은 556의 관통력, 가벼운 무게, 적은 반동에 주목했다. 하지만 그 전에 사용했던 개런드 소총의 탄환은 7.62mm. 신생 탄환의 위력을 의심하던 미군은 월남전에서 테스트를 한 뒤 결과 보고서를 남긴다.
얼마 전 그 보고서를 우연히 읽게됐다. 1962년 미 국방고등연구계획국에서 생산한 것이다. 당시에는 Confidential (3급기밀) 등급 문서였지만, 현재는 공개돼있다. 보고서 내용에는 556에 맞은 베트콩 5명의 사망 과정이 있다. 모두 30m~100m 거리에서 맞았다 1. 등에 맞아 흉강 파열로 즉사. 2. 배에 맞아 복강 파열로 즉사. 3. 둔부에 맞자 양쪽 둔부 완전 파괴.(이 사람은 5분 뒤에 사망했다고 한다) 4. 가슴을 관통하며 흉강 파열로 즉사. 5. 발꿈치에 맞자 다리부터 둔부까지 파괴되며 즉사. 그리고 556의 장단점 분석과 결론이 무미건조하게 이어졌다. 나는 이 보고서를 읽으며 광주의 음산한 열람실을 떠올렸다.
기록은 주관과 감정이 배제된 경우가 많다. 누군가의 비극인 죽음도 무미건조하게 서술한다. 나는 이것이 좋은 기록의 원칙인 것으로 이해한다. 슬픔이나 공분을 일으키는 비극적 사실과 이를 기록하는 원칙은 대비된다. 누군가의 비극인 죽음도 기록에선 그저 텍스트, 데이터, 시각자료에 불과하다. 이 차이에서 음산함이 전해진다. 또, 그러한 기록은 은밀히 보관되고 있다. 그러면 음산함과 은밀함이 더불어져 어떤 음험함이 느껴지는데, 난 이런 기록물이 좋은 기록물이라고 생각한다. 난 좋은 기록물을 파헤치는 일을 업으로 하고싶다. 매일 갈색 봉투에 담긴 문서의 바삭거리는 촉감을 느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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