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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루다
나는 퇴사한 적이 없다. 입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퇴사자를 근거리에서 오랜 기간 관찰한 적은 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말은 많다. 퇴사는 미남 혹은 미녀가 입을 벌리니 충치가 빽빽한 것과 비슷한 일이다. 외관과 내부의 괴리가 크기 때문이다. 현실의 퇴사는 미디어가 그리는 것처럼 낭만적이지 않다. 퇴사가 맥주보다 좋은 이유는 없다. 맥주가 퇴사보다 좋지도 않다. 퇴사와 맥주는 똑같다. ‘비루’(ビール·맥주)이기 때문이다. 퇴사는 비루하다.
내 스승 C는 기자이자 개발자였다. 어느 업계든 몸만 담으면 촉망받았고, 업계마다 몇 개의 크고 작은 성취를 남겼다. 그래도 한곳에서 멈추지 않고 계획했던 일을 이루기로 작정하고 밥벌이하던 곳을 무작정 떠났다. 지금 C는 홀로 낯선 곳에 터를 잡고, 자신이 가진 기술을 응용해 밥벌이를 한다. 그런데 첨단의 밥벌이 기술을 발휘해도 삶은 비루해지기만 한다. 쌀독은 오래전에 아작 났으며 아픈 곳이 많아진다. 병원에 가거나 쉴 수도 없다. 그 시간에 밑 빠진 쌀독을 한 되라도 더 채워야 하기에 그렇다.
라면 아닌 다른 것으로 요기해본 지도 오래다. 회사라는 안전망의 역할이 얼마나 컸으면 벗어나자마자 똑같은 기술로 밥벌이해도 삶의 존엄도가 이렇게 달라지는가. 이 비루한 현실 때문에 C는 자신의 작정이 문제였는지, 무작정이 문제였는지 요즘 혼란스럽다. 석 달 전 C와 함께 철야하고 퇴근하는 길, C가 내게 말했다. “한번 회사에 들어가면 절대로 나와선 안 돼. 절대로.”
C는 맥주를 즐겨 마신다. 퇴근길에 들른 국밥집에선 소주 한 병에 맥주 두 병을 시켜 말아 먹고, 쉬는 날 집에선 캔맥주 4개를 홀로 들이켠다. 일상적인 폭음에도 C의 몸무게는 꾸준히 줄어든다. 어쩌면 삶의 무게가 늘어나는 만큼 몸의 무게는 줄어드는 건지도 모른다. 돈은 없어도 술은 마셔야 한다는 그의 확고한 신념과 행동은 ‘퇴사=비루=C’ 공식을 증명한다.
나는 입사가 요원한 취업준비생이자 퇴사자의 비루함을 지켜본 목격자다. ‘퇴사가 맥주보다 좋은 이유 7가지’는 모르겠지만 비루함이 어떤 것인지 70가지는 얘기할 수 있다. 그래서 내게 입사는 소득 활동 개시, 부모로부터의 독립, 자아실현 계기 따위를 넘는 의미다. 내게 입사는 삶의 존엄에 관한 문제다. 나는 배고플 때 얼마든지 밥을 먹고 싶고, 추울 때는 옷을 입고 싶다. 집에서 잠자고, 아프면 병원에 갈 수 있는 삶의 존엄을 갖고 싶다. 입사를 못하거나 퇴사하면 이 모두를 이루기 어렵다. 회사에 속하지 않는 건 삶의 존엄을 내려놓는 일이다.
사직서를 제출한 그날 밤부터 아침까지 술을 먹고 춤춘다. 공백기 동안 세계를 여행하며 여유와 내적 충만함을 즐긴다. 미디어는 이렇게 퇴사를 유쾌한 해방으로 묘사하니, 입사도 못해본 나와 퇴사자 C는 환장할 노릇이다. 회사에 속하지 않더라도 모두가 저렇게 존엄할 수 있을까. 미디어의 해방운동가들은 방송사와 출판사라는 안전망을 벗어나본 적이 있을까. 그들의 상상과 대중의 환상을 조합한 공허함을 파는 건 아닐까. 그들의 밥벌이를 위해 사람들에게 비루함을 종용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우리 사회가 퇴사해도 비루하지 않은 사회였으면 좋겠다. 퇴사가 맥주보다 좋은 이유 7개쯤은 거뜬히 나오는 사회 말이다. 그러니 해방운동가들이여, 제발 우리에게 퇴사를 부추기지 마라. C는 지쳤고 나도 지쳐간다. 대신 퇴사가 비루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얘기해달라. 7시간 생중계 토론을 하든, 7부작 기획보도를 하든, 회사에 속하지 않으면 얼마나 비루한지, 입사자는 어떻게 늘리고, 퇴사자는 어떻게 줄일지, 어떤 제도가 빈약하고, 무슨 제도를 만들어야 할지를 얘기해달라. 회사에 속하지 않은 자들의 존엄을 어떻게 보장할지 얘기해달라.
가닿지 않을 요구를 하고 노트북을 덮는다. 그리고 C에게 전화를 건다. “C, 이따가 맥주 한잔합시다.”
(9.5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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