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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루다
며칠 내내 오른 쪽 어깨가 뻐근하다. 시선을 모니터에서 걷어내 창문에 널고 기지개를 켰다. 팔을 털썩 내리고도 시선은 여전히 빌딩 아래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따라간다. 독촉하는 팀장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다했다고 얼버무린다. 네 시 즘이면 볕이 창을 넘어 책상까지 침범한다. 핸드폰이 부르르 떨린다. 저녁 약속을 알리는 알람이다.
정시에 퇴근하려는데 팀장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못본 척 얼른 코트를 낚아채 사무실을 나선다. 약속 장소로 향하는데 들뜰 만남인지 고민해봤다. 대기업에 다니는 민영은 씀씀이도 커져서 매번 그럴싸한 와인 바에서 만나자고 한다. 통장잔고를 떠올렸다가 고개를 휘휘 젓고 눈을 크게 뜬다. 민영은 최근 관심사인 회사 비자금 이야기를 하겠지. 사무실에서 후기를 찾다가 본 안주를 입에 넣는 상상이나 한다.
*
맞은 편에 앉은 민영은 ‘오빠’로 시작하는 조건부 문장만 이십 분째다. 예상과 다른 대화주제지만 성의껏 듣는 척해본다. 이내 와인잔을 휘휘 돌리는 민영에게 시선을 뺏긴다. 시작한지 몇 달 안 된 연애 이야기에 민영은 배시시 웃다가 핏대를 세우기도 했다. 이제야 이쪽 안부를 묻는다.
“헤어진지 오래야.“
“아니 그러니까 왜 헤어졌냐고.”
“그냥, 안 맞으니까 헤어지자 했지.”
잔 받침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오래 알고 지낸 세월을 무기로 쥐어준 적이 없는데. 민영이 곧 쏟아낼 말을 들을 여지가 없다. 화장실 좀, 말하고 자리를 벗어났다. 양 손으로 세면대를 짚고 한참 있었던지 뻐근했던 날갯죽지가 튀어나갈 듯이 고통스러웠다. 속부터 길어나오는 한숨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올해 초부터 친구들은 이직이나 상견례 소식을 전했다. 그때마다 친구들과 마주앉아 축하한다, 신혼집은, 같은 말을 적재적소에 찔러 넣었다. 오늘이라고 별반 다를 바 없이 상관 없는 말을 귓등으로 듣고 기분 좋게 와인이나 마시려 했는데. 자리로 돌아와서 남자친구 자랑을 하느라 잔뜩 올라간 입꼬리 때문에 볼이 두둑이 부푼 친구의 얼굴을 바라봤다.
“오래 만날 생각으로 연애를 해봐. 좋은 사람 만나는 게 이렇게 행복한 줄...”
위한 답시고 안할 말을 참지못하는 민영의 말을 들어내며 손 끝으로 빵 부스러기를 궁글렸다. 뒷 말은 와인 향이 콧속부터 뇌까지 가득 차 잘 들리지 않았다.
와인 두 병을 포함한 계산서를 망설임 없이 카운터에 내밀던 민영에게 태연한 척 고마움을 전하고, 힘주어 흔들었던 손으로 심야버스 손잡이를 낚아챘다. 투 잡을 해볼까 싶어 지원했던 아르바이트에 탈락했다는 문자를 확인했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전화 올 곳은 없었고 메시지 창도 잠잠했다. 손에 힘을 주고 버스 손잡이를 잡아도 몸이 앞뒤로 나부꼈다. 눈을 감으니 아파트, 자동차, 결혼식장, 바 메뉴판, 팀장 얼굴 같은 게 뒤섞여서 떠올랐다.
마음대로되는게하나도없네씨발,
속으로 한 말이 밖으로 나온 걸 알아차렸을 땐 이미 앞자리에 앉은 어른이 젊은 사람이 상스럽다고 내지르는 고성으로 버스가 가득 차고 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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