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정하기
기루다
다자이 오사무가 그랬듯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다. 사랑보단 증오가 먼저인 삶이었다. 나조차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니 남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순리. 이렇게 살아도 될까. 고뇌하다 지난 겨울 성당의 문을 두드렸다. 혹여나 신이 계신다면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마저 남루해지는 내 마음을 고쳐달라 외치고 싶어서.
오늘 취재차 근교에 미술 전문 도서관을 찾았다. 한 시간 삼십 분이 걸리는 여정을 거치며 도착한 도서관은 볼거리가 아주 많았다. 그중에서도 눈길이 간 건 가톨릭 성물을 진열한 곳. 곧 세례*를 앞두고 있어서일까. 다른 미술 작품이나 서적보단 그 공간이 눈에 띄었다. 타이밍 좋게 마침 관장도 도서관에 들어왔다. 그와 내부를 둘러보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가톨릭 신자예요?” 내가 물었다.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저도 신자예요.”
“세례명이?” 그가 물었다.
“루치아요.”
루치아는 로마제국 시대에 순교한 가톨릭 성녀의 이름이다. 라틴어론 광명 또는 빛. 뜻이 마음에 들어 정했다. 내 멋대로 해석한 뜻은 이렇다. 타인을 사랑하며 세상을 밝게 비추리라. 대화가 구구절절 길어질까. 그것까진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취재가 끝났다. 도심으로 돌아가기 위해 나오니 비가 오고 있었다. 우산이 없었다. 그런데 비는 많이 내리지 않았다. 버스정류장도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비를 맞는 건 익숙한 일상이었다. 관장에게 인사를 하고 무작정 걸었다. 그때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봤다. 그는 나를 부르고 있었다.
“루치아, 루치아!”
보통의 취재원들은 나를 기자님 혹은 박기자라 부른다. 같은 가톨릭 신자인 그는 세례명을 불렀다. 그에게 뛰어갔다. 나를 부른 건 우산을 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비를 맞고 가는 모습을 뒤늦게 본 듯했다. 낡은 우산이라 돌려줄 필요 없이 쓰고 버리면 된다며 건네는데, 순간 눈물이 터져 나올 뻔했다.
그에겐 작은 친절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겐 그런 친절이 타인을 사랑하며 살아가라는 뜻을 신께서 준 선물 같아서. 사랑보단 증오가 먼저였던 그동안의 삶이 얼마나 얄팍한 생이었는지 다시금 깨닫게 해서 몸이 서늘해졌다. 기자가 된 것, 성당의 문을 두드린 것, 도서관을 취재한 것, 그를 만난 것. 그 모든 것이 부끄럼 많은 생을 살아온 나를 돕기 위한 신의 뜻이었지 않을까. 신은 항상 나의 곁에 있었는데 나는 그걸 너무 늦게 깨달은 건 아닐까. 그의 친절과 신의 뜻에 감사하며 타인을 사랑하려 노력해 보려 한다. 뒤늦게라도. 그가 버리라 한 우산은 신발장에 고이 넣어두며.
2024年 3月 24日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세례: 입교하는 사람에게 모든 죄악을 씻는 표시로 베푸는 의식.
(6.7매)3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