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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II

얼마전 책빵고스란히를 나서는데 사장님이 급히 따라나와 나를 붙잡았다. 우린 카페가 쉬는 날을 제외하고는 거의 매일 보는 사이다. 비건인이 된 것도 4-5년전 쯤 이곳에서 구입한 한 권의 책때문이었다. 사장님들의 따뜻한 배웅을 받는 경우가 자주 있지만 이렇게 붙잡는 경우는 흔한 일이 아니다. 그녀는 부탁이 있다 했다. 며칠후 있을 '참사는 골목에 머물지 않는다' 북토크에 참가 신청을 해달라며 무조건 해주면 좋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부탁을 쉽게 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알기때문에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신청하고 한동안 잊고 있었던 이태원 참사관련 진행상황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건강을 위한 운동은 하나도 안하면서 꽤 오랜 시간 사회운동을 해왔다. 개인적으로 그리고 최대한 조용한 방식을 택했다. 나는 고통을 보면 민감하게 감응하고 이런 성향은 자연스럽게 연대로 이어진다. 북토크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연대 행동인데 최근 등한시하고 있었음을 부탁을 받고서야 깨달았다.
북토크에는 작가단 작가 한분과 희생자 아버님 세분이 오셨고 15명의 대구시민들이 참석했다. 아버지들은 잃어버린 딸들과 비슷한 또래의 독자들을 바라보며 그렁그렁한 눈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우린 함께 울면서 애도하고 다시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계속 연대하겠다고 다짐하면서 행사를 마쳤다. 사회적 참사의 피해자 가족들은 똑같은 과정을 반복적으로 겪게 된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사회적 참사를 겪으면서도 우린 먹고 살기 바빠서, 어차피 변하지 않을 거라서 기타등등의 이유로 관심을 꺼버리기 일쑤다. 나와 상관없을 일이어야 한다고 다짐하듯이 말이다. 비평글을 써야하는데 왜 이렇게 서문이 길어지는가... 그건 내 마음이 들끓고 있기때문이다. 난 화가 난다. 고작 함께 아파하는 것말고는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해서 말이다.
김훈작가의 특별기고문을 읽으며 내가 느낀건 무력감이었다. 그는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하며 온갖 권력자들과 지식인들 종교지도자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우는 것이 더 사람다울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차라리 그가 글로 지껄이기를 바란다. 그가 잘하는 것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를 말이다. 그는 자신의 무력감에 압도되어 우리 사회에 반복되는 비극적 현실을 풍자 소설처럼 만들어 버렸다. 그가 선택한 '킬링 필드'라는 단어도 젊은 남편의 아내 사랑에 대한 소망과 사랑의 서사에도 난 하나도 공감되지 않았다. 그는 글 뒤에 숨어 패배감에 젖어 신문 1면이 그를 포함한 우리모두에게 하는 질문에 등돌리고 있는 것 같다. 한계를 자신의 글로 증명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의 글에는 마땅하게 있어야 할 '분노'가 느껴지지 않는다. 심지어 아픔에 대한 '공감' 조차 없다. 소설같고 영화같은 묘사속에 산업재해로 죽임당한 이들과 가족들에 대한 비겁한 변명만 보인다.
김훈의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로써 나는 그가 흑산에서 한 작가의 말을 기억한다.
“나는 말이나 글로써 정의를 다투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다만 인간의 고통과 슬픔과 소망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그는 기고글에서도 고통과 슬픔과 소망을 말하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정의를 다투려는 목표가 없어서 처참한 죽음들앞에 그저 우는 시늉을 할 뿐이다.
2019년 11월 21일자 경향신문 1면을 눈앞에 두고 내가 느낀 감정은 너무 복잡해서 설명이 안되는 정도의 압도감이었다. 우리는 반복적으로 이런 일을 겪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일을 모른다. 경향신문은 1면에 희생자들의 이름과 나이 그리고 사망원인을 명시함으로써 우리가 모른척 외면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피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
언젠가 뜨거운 마음으로 읽었던 '분노하라'라는 책에서 저자이자 활동가 스테판 에셀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분노의 동기를 갖기 바란다. 이건 소중한 일이다. 내가 나치즘에 분노했듯이 여러분이 뭔가에 분노한다면, 그때 우리는 힘 있는 투사, 참여하는 투사가 된다. 이럴 때 우리는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게 되며, 역사의 이 도도한 흐름은 우리들 각자의 노력에 힘입어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 이 강물은 더 큰 정의, 더 큰 자유의 방향으로 흘러간다."
분노는 동력이다. 정당한 분노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좀 더 살만한 곳으로 만들수 있는 힘이 될 수 있다. 나는 김훈이 희생자가족들을 안고 통곡하는 대신 그의 문장으로 희생자 가족과 함께 싸워줬으면 좋겠다. 그는 그럴 수 있는 힘과 자원을 가지고 있는데도 왜 이 정도의 글로 면피하려고 할까.
그날 난 북토크가 끝나고 울음을 멈추지 못하는 두명의 친구를 토닥이며 안았다. 둘이 울음을 그치고 집으로 돌아가고 사장님과 북토크 행사를 진행한 2호님과 잠깐의 소회를 나누다가 그만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쏟아지기 전에 얼른 문을 나서며 인사를 하고 걸으며 알았다. 나도 눈돌리고 있었다는 걸. 어떻게 하면 몸도 마음도 정신도 단단해 질 수 있을까. 힘이 쎄지면 연대하는 일을 더 힘차게 할 수 있을까. 나는 왜 늘 우는 편에 서있을까.
어쩌면 김훈도 압도되었을지 모른다. 전직기자로서 누구보다 사회문제에 대해 보고 듣는 것이 많았을 그다. 그도 한 때 분노했을 것이다. 그도 한 때 행동했을 것이다. 그가 분노보다 슬픔을 선택하게 된 사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가 스테판 에셀처럼 분노하라고 촉구하는 지성이길 바란다. 무력감 속에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을 경향신문 1면이 했던 것 처럼 불러 일으켰으면 좋겠다. 그의 소설로 내 마음을 뜨겁게 만들었던 것 처럼 말이다.

(13.5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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