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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몇 달 전 한 프로그램을 봤습니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입니다. 일종의 사회실험입니다. 12명의 젊은 남녀가 나옵니다. 9일 동안 작은 커뮤니티 안에서 리더를 선발하고 상금을 분배합니다. 이 실험은 현실 정치와 닮았습니다. 공존할 수 없는 이념들이 모였기 때문입니다. 출연진들은 정치, 젠더, 계급, 사회윤리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사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빈곤의 가장 큰 책임은 본인에게 있다.” “대중매체 속 조선족 범죄자 묘사는 사라져야 한다.” “국가 발전에는 유능한 독재자가 필요한 시기가 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건 한 여성 출연진의 말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당연하지 않아서. 현실과는 먼 이야기라 와닿았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어떤 세상을 상상할 때 내가 어떤 인간이 되어도 너무 불행하지 않은, 그 세상이 너무 두렵지 않은 세상이 되길 바라요.”
세상은 병을 앓고 있습니다. 혐오와 배제에서 기인한 병입니다. ‘노OO존’이라는 현상이 대표적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노OO존에는 뭐랄까, 인간의 존엄성을 마모시키는 요소가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동부터 노인, 중년 여성, 교수, 유튜버까지. 특정 집단의 출입을 금지하는 시설이 늘고 있습니다. 주된 이유는 이렇습니다. 소란을 피우거나 가게의 분위기를 해친다. 이에 찬성하는 이용객 입장도 비슷할 것입니다. 쉬는 날 카페에서 휴식을 만끽하는데 아이들은 뛰어다닙니다. 어떤 이는 소리를 질러가며 통화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인간들이 전부 사라지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사장이라면 이들을 내보낼 거라 상상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타인에게 무례를 당하고, 범할 수도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노인을 욕하던 내가 어느덧 노인이 되거나, 유튜버를 욕하던 내가 새로운 꿈을 찾아 유튜버가 됐는데, 일부 식당이나 카페에 가지 못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당연한 법칙이라 할 정도는 아니지만 인간은 묘한 곳에서 묘한 것과 부딪히는 법입니다. 언제든 그럴듯한 이유를 내세운 차별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진부하지만 역지사지가 필요하다, 이런 심각한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존 롤스가 고안한 무지의 베일 이론이 떠오릅니다. 출신 배경, 사회적 위치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최악의 상황에 처할 것을 우려합니다. 그래서 합리적 선택을 한다고 합니다. 앞서 언급한 여성 출연진의 말처럼, 모두가 어떤 인간이 되어도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상상해보면 어떨까요. 혐오와 배제가 아닌 공생으로 합의점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사회 구조적 변화와 정책적 지원도 뒷받침돼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마이클 샌델 교수는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공동체의 정의는 모든 구성원의 권리와 존엄을 존중하는 데 달려 있다”고 썼습니다. 앞으로 어떤 공동체에서 살아갈지에 대한 답은 우리 선택의 몫입니다. 당신께서도 그 답을 함께 고민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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