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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얼마전 좋아하는 인디가수의 공연을 보러 제임스레코드에 갔다. 느긋하게 앉아 흥얼거리며 듣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가 김일두의 노래를 부르는 거다. 대구에서 김일두의 노래가 가장 어울리는 곳이 바로 제레가 아닌가! 영록이 ’김일두‘를 커버하다니!’ 노래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부른노래는 '문제없어요'라는 곡이다. 2013년쯤에 발표한 ‘곱디 맑은 영혼’이라는 음반에 선보였던 인기곡 중 하나다. 김일두의 곡들은 대체로 멜로디가 단순하다. 가사는 직설적이기도 은유적이기도 해서 뭐라 한문장으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여러번 듣고 부르다보며 ‘아... 아~~~ 아!’ 하게 되는 특별함이 있다. 인디씬에서 싱어송라이터라고만 불리기에 그의 존재는 너무 크다. 그래서 그는 김일두라는 장르로 불린다. 그의 특별함은 노래를 통해 생각을 느끼게 만든다는 점이다. 복잡한 문제들을 쉬운 일처럼 느껴지게 하는데 탁월하다. 김일두를 들을 땐 그래서 가사에 집중한다. 이번 곡도 마찬가지였다. 귀를 쫑긋 세우고 내가 들은 가사는 다음과 같다.
[당신이 이혼녀라 할지라도 난 좋아요 /가진 게 이 집뿐이라도 문제없어요 /그게 나의 마음]
이혼녀라... 이혼이 흔하지 않았던 시절(2013년곡)에 이혼경력이 사랑의 커다란 장애물 같은 거였나? 그런데 집을 가지고 있는거면 그리 나쁜 조건이 아닌거 같은데, 다 쓰러져가는 집인가? 뭐지?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날 이후로도 이 노래를 여러번 들었고 한번 불러보고 싶어서 가사를 찾아보았다. 그랬더니 '이 집뿐이라도'라고 들었던 가사가 '에이즈뿐이라도'였다. 아!!! 가진게 에이즈뿐이라면... 갑자기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그의 세계관 속 사랑의 환영에서는 에이즈도 문제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즐겨 부르는 '일곱박자'도 혹시? 하는 생각이 들어 가사를 검색해봤다. 그랬더니 지금까지 '그저 맑았을 뿐' 이라고 알고 있었던 가사가 사실은 '그저 맑아 슬픈'이었다. 문맥이 맞지않지만 시적허용이라 여기며 계속 틀린 가사로 부르고 있었던 거다. 다시 퍼즐이 맞춰지고 노래가 제 모습을 찾았다. '그저 맑아서 슬픈' 감정을 나는 알것 같았다. 그래서 곡이 더 깊이 소중해졌다. 가사를 알고 들으니 ’그저 맑아 슬픈‘이었다. 아는 만큼 들린다더니... 딱 그랬다.
특별히 '운명적인 깨달음'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인간은 방심하는 순간에 특별한 것과 부딪히는 법이다. 갈까말까 고민했던 공연에 가지않았다면 그리고 영록이 그 노래를 멋지게 부르지 않았다면 난 가사를 찾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혼 경력이 큰 걸림돌이라 생각하는 보수적인 김일두는 집이 하나만 있는게 좋은 조건이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판단하며 노래를 들을때마다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가사를 잘못들어서 오해한 게 미안한 마음이다.
세상에는 말을 잘못 알아들어 생긴 오해가 얼마나 많을까. 우리는 경청하는 것 같지만 경청하는 순간에도 단어와 뉘앙스를 자신의 관념이나 선입견에 맞춰 듣는다. 우리가 듣는 것은 상대방의 말이 아니라 우리 생각일지도 모른다.
최근 나는 오해하고 있었던 여러가지 일들의 진실을 알게되었다. 김일두의 가사를 잘못듣고 오해했던 것처럼 난 사람들의 말을 잘못알아들어 좋아하는 걸 싫어하는 걸로 싫어하는 걸 좋아하는 걸로 오해하고 있었던 거다. 말은 여러모로 오해를 부르기 쉽다. 그래서 자꾸 말이 줄어든다. 내가 아무리 설명해도 어떤 말은 오해되고 아무렇게나 말해도 어떤 말은 이해받는다. 말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라서다. 가사를 잘못들었어도 그 노래가 좋으면 굳이 가사를 찾아보고 바로잡는것 처럼 마음만 있으면 오해가 있어도 결국에는 바로잡고 제대로 알게된다. 얼마나 많은 오해를 바로잡아야 한 사람을 제대로 알게될까. 아득하지만 역시 내가 그러고 싶다면 기꺼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마음이 다한다. 결국.
우리에게 언어가 없었다면 오해도 없었을까. 내 상상력은 나를 말이 필요없는 세계로 데려간다. 그때는 소설쓴다고 허리가 나가도록 앉아있지 않고 들판을 뛰어다니며 춤이나 췄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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