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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필름 카메라, 노트, 펜, 립밤, 책 한 권. 여행 중인 구름의 가방 안에 항상 있는 것들이다. 가끔은 노트북까지도. 무거운 가방과 코트를 벗어 여기 호텔 방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왠지 시간의 좌표축이 조금씩 느슨해지고 있는 듯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아직은 한낮인 시간대. 하지만, 이 방 안에서만큼은 시간을 가늠할 수 없다. 커튼은 단단히 쳐 두고, 옷은 갈아입지도 않은 채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한낮에 약간은 어두운 공간에서 그렇게 조용히 혼자 있으면 매번 그런 느낌이 든다.
구름은 새로운 도시로 여행을 떠날 때마다 하루는 앓아눕는다. 아마 물갈이인 듯하다. 오사카에서도 파리에서도 밴쿠버에서도 아까운 하루를 몽땅 침대에서 보내야 했다. 처음엔 분했다. 가성비가 너무 안 좋은 몸을 가진 것이. 평소에는 잔병치레도 없는 몸이 나오기만 하면 이런다. 기껏 시간과 돈을 들여온 곳이라 원망스러웠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그런 자신이 익숙해져 버렸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그 말이 딱 맞다. 아플 것 같으면 '이럴 줄 알았다'하고 모든 일정을 멈춘다. 빨리 멈추고 쉬어야 빨리 회복할 수 있다. 심지어 그게 구름의 여행 방식이 되어 버렸다. 하루 종일 호텔 방에 박혀있다 밥시간 때만 어슬렁어슬렁 기어 나오는 그런 여행 말이다. 꼭 아프지 않더라도 구름의 지난 여행에는 그런 순간들이 자주 있었다. 딱히 어딜 가거나 뭘 하고 싶지 않은. 때론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이 더 기억에 남기도 했다.
파리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몸컨디션이 좋지 않음을 직감한 날. 하지만 아쉬운 맘에 외출을 감행했고 더 이상 못 버티겠다 싶어 숙소에 들어가 기절한 듯 잠이 들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베개와 이불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땀을 잔뜩 흘리며 푹 자고 일어났더니 온 몸과 정신이 맑고 가벼웠다. 원래부터 아름답긴 했겠지만, 그날 컨디션을 회복하고 다시 나가서 본 에펠탑이 그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다. 어여쁜 색으로 물든 노을과 반짝거리는 에펠탑 앞에서 찍은 그 사진엔 그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해맑게 웃고 있는 그 사진은 볼 때마다 구름을 그 순간으로 데려다 놓는다.
구름이 여행자인 자신에 대해 알게 된 것이 또 있다면, 그건 뭘 하려고 떠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저 습관적으로 자신을 낯선 곳에 데려다 놔야 직성이 풀린다. 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금처럼 한낮에 침대에 누워있어도 상관없다. 딱히 하고 싶은 일도, 해야 하는 일도 없으므로. 이렇게나 게으른 여행자라도 잘 쉬었으니 아무렴 어떤가. 그리고 구름의 생각엔 '여행자'와 '게으르다'는 말이 완벽하게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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